[안보칼럼 67] 일제의 만행과 신앙의 절개(1)

오피니언·칼럼
순교자 주기철 목사

3.1독립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정치(1910~1919)의 한계성을 절감하고 문화정치(1919~1931)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문화정치란 무력의 힘이 아닌 교화로서 다스리는 정치를 말한다. 당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먼저 조선인들이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여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또 조상들의 무위·무능·악행을 과장하여 조선을 경시하고 멸시하게 하므로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 역사·인물·문화를 사모하게 하여 일본인으로 만들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일제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철저하게 짓밟고 파괴하고 말살하기 시작했다.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고 우리 역사책 51종 20만 권을 쟁탈하고 불 질렀다. 그리고 1925년 이 조직을 확대 강화한 조선사편수회를 발족하고, 1938년까지 37권의 조선사를 일본의 주장대로 편찬했다. 이를 식민사관이라 하는데, 한국인은 다른 나라의 지배하에 살아온 민족이기에 자립할 능력이 전혀 없으므로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서 일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침략미화론을 내세우며 한국인의 정체성과 민족의 역사를 깡그리 지워버리고 말았다.

또 전시 식민지 정책으로 황국신민화 정책을 전개해서, 한국인이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증거로 매일 일왕의 궁궐을 향해 절을 하게 했다. 이것이 동방요배로, 한국인이 일왕에게 충성하는 마음으로 모든 전쟁터에 자발적으로 나가는 것이라며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했다.

1936년 조선의 히틀러라고 불리는 미나미 지로가 제7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여 각 읍면 단위마다 신사를 설치했고, 그 수가 2,300개나 되었다.

◇학교에서의 신사참배 강요=일제는 전국 교회를 상대할 경우 강한 반대에 부딪칠 것이 두려워서 먼저 기독교 관련 학교에 손을 뻗었다. 당시 기독교계 학교는 800여 개가 있었다. 1931년 평안남도는 공, 사립 중학교 교장회의를 소집하고 신사참배를 명령했다. 이에 숭실, 숭의, 의명중학교 교장들은 신앙상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파면당했다. 또 학교가 폐쇄를 당하더라도 신사참배는 불응한다는 ‘마포삼열 계열’과 학교를 살리기 위해서 동조한다는 ‘언더우드 계열’로 분열되었다.

◇교회에서의 신사참배 강요=일제는 자신들의 정책에 가장 걸림돌인 교회 지도자들을 노골적으로 박해했다. 일제는 각 교단에 가미다나 라는 작은 신단을 만들고, 예배 전에 먼저 단에 절을 하는 동방요배를 강요했다. 이에 반대하면 가차 없이 끌어다가 옥에 가두고 온갖 고문으로 수많은 주의 종과 성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1931년 9월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는 십계명에 위배되고, 사신 우상(死神 偶像, 죽은 신의 우상)에게 절하는 건 죄라고 하며 신사참배 반대를 경남노회에 건의했다. 하지만 1938년 9월 장로교 제27회 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 등 총대 88명,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등 206명이 일제의 권력 앞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주기철, 박봉진, 허성도 목사 등은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에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했다.

당시 한국에서 제일 큰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인 주기철 목사는 1936년 7월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자마자 5층 건물의 새 성전을 건축하고 헌당예배 당일 체포되었다. 그리고 1938년 제3차, 1939년 제4차로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받으며 신앙의 절개를 지켰지만, 1939년 12월 19일 총회에서 목사직을 파면당하고 1940년 3월 24일 산정현교회가 완전히 폐쇄되고 목사관 사택에서 그의 가족이 쫓겨났다.

주 목사에 대한 일제의 잔악한 고문은 뾰족한 못 판 위를 맨발로 걷게 하고, 주전자에 고춧가루를 풀어서 코에다 붓고, 전기 고문을 해서 몸이 찢기고 손발톱이 다 빠지고 입, 코, 귀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잔인하게도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고문을 해서 당시 열 살의 아들은 3년간 실어증이 왔고, 어머니는 정신병에 시달리며 기도했다. 순교 당일 피골이 상접한 주 목사의 죽음을 예상한 형무소장이 오정모 사모를 만나게 해주었다.

이범희 목사

주 목사는 오 사모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어머니와 자식들을 부탁하오.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산정현교회와 조선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소, 나의 죽음이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보, 나 펄펄 끓는 숭늉 한 사발 마시고 싶은데...’

이후 5시간 후인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해방 1년 4개월 전에 애국자 주기철 목사는 7년간의 옥고 끝에 47세 나이로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하였다. 나라의 독립을 위한 그의 고귀한 애국심은 잔악한 일제에 의한 죽음 앞에서도 결코 흔들림이 없었으며 민족해방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이범희 목사(㈔한국보훈선교단 이사장, 6.25역사기억연대 역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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