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사법부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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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성 교수

우리 사회에서 사법부의 독립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권력이 크다는 데 있지 않고, 권력을 법과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사하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통령과 대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 사이에 권한의 해석이 충돌할 때에는 개인의 정치적 성향보다 헌법과 법률, 그리고 제도적 원칙을 먼저 살펴야 한다.

9월 22일 조희대 대법원장이 청와대의 대법관 후보자 재제청 요청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 대법원장은 재제청 요청 문서에 구체적인 사유와 헌법적 근거가 적시되어 있지 않고, 달리 이를 정당화할 구체적인 헌법적 근거와 사유도 찾을 수 없다는 취지의 입장을 내놓았다.

이번 사안의 출발점은 대법관 인선이다. 조 대법원장은 지난 8월 18일 노태악 전 대법관의 후임으로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실질적인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일방적인 서면 제청이라며 8월 28일 재제청을 요구했다. 이에 조 대법원장은 25일 만에 재제청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다.

청와대는 이에 대해 대통령의 임명권과 관련된 헌법적 권한을 대법원장이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반면 조 대법원장 측은 재제청 요구 자체를 정당화할 구체적인 헌법적 근거와 사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결국 지금의 논쟁은 어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과 대법원장의 제청권이 헌법 질서 안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라는 중요한 헌법적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법부 수장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치적 유불리를 계산하는 태도가 아니라 헌법과 법률에 대한 충실성이다. 물론 대법원장의 판단 역시 헌법적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통령과 청와대의 반론 역시 충분히 검토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느 기관이 더 큰 목소리를 내느냐가 아니라, 헌법이 정한 권한의 경계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이다.

사법부가 행정부의 요구를 언제나 받아들여야 한다면 사법부의 독립은 형식에 그칠 수 있다. 반대로 사법부가 자신의 권한만을 절대화한다면 그것 역시 바람직한 삼권분립이라고 할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권력분립은 서로 대립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서로의 권한을 존중하고 견제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조희대 대법원장의 결정은 정치적 찬반의 문제를 넘어 법관이 헌법적 판단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책임지는 자세가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일부에서는 이를 사법권 독립을 위한 결단이라고 평가하는 반면, 청와대와 여권에서는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을 제약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현재 논쟁이 단순한 인사 문제가 아니라 헌법 해석과 권력분립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권력자 한 사람의 선의만으로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권력을 가진 기관들이 자신의 권한에 한계를 두고, 다른 헌법기관의 권한을 존중할 때 민주주의의 토대가 더욱 단단해졌다.

사법부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대법원장은 모든 국민에게 법의 최종적인 판단을 제공하는 사법부의 수장이다. 그러므로 대법원장이 어떠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정치적 압력이나 여론의 방향보다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여 판단해야 한다. 동시에 그 판단은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되고 공개적으로 검증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얻는 길이다. 용기는 목소리를 크게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의 근거를 분명히 알고, 그 근거에 따라 책임 있게 판단하는 데 있다.

이번 사안을 바라보는 국민에게도 필요한 것은 진영의 논리가 아니라 헌법의 눈이다. 대통령의 권한도 존중되어야 하고, 대법원장의 제청권도 존중되어야 한다. 어느 한쪽의 권한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압도해서는 안 된다. 헌법은 권력기관을 서로 견제하도록 만들었으며, 바로 그 균형 속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호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주목해야 할 것은 누가 이겼느냐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헌법 질서가 이번 논쟁을 통해 얼마나 성숙하게 작동하느냐이다. 사법부의 독립은 사법부만을 위한 특권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 제도적 안전장치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사법부가 존재할 때 국민은 권력의 크기와 관계없이 법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대법관 재제청 논란도 정치적 승패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보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 차분하게 풀어가야 한다. 대통령과 대법원 모두 국민에게 부여받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 만큼, 어느 기관도 헌법 위에 설 수 없다. 법 앞에서는 강한 권력도 작아져야 하고, 헌법 앞에서는 모든 기관이 겸손해야 한다. 그것이 법치주의의 출발점이며, 민주공화국을 지키는 가장 오래된 원칙이다. 이번 논쟁이 갈등의 확대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삼권분립과 사법부 독립의 원칙을 더욱 분명하게 세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People-centered politics를 넘어Law-centered politics”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시편 89:14)

양기성 교수(Ph.D., Hon. Th.D.)
서울신학대학교 행정학 특임교수
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대표회장

#양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