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 8일 일본의 육군 선발대가 인천 월미도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는 한편 일본의 함대는 여순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9일에는 인천 앞바다에 러시아 함대와 격돌했다. 그리고 10일에는 러시아와 일본은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주한 러시아 공사는 12일에 러시아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서울을 빠져나갔다.
대한제국은 이미 1904년 1월 23일에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면서 한일의정서를 1904년 2월 체결했다. 대한제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한국의 국토를 마음대로 사용하고, 군사 활동을 했다. 또 통신시설을 군용으로 접수하고 경부, 경의선 철도 부설권도 일본 군용으로 넘겼다.
일본육군은 1905년 1월 여순 요새를 함락하고, 이어서 봉천을 점령하였다. 일본해군은 1905년 5월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대한해협에서 격파하고 완승을 했다. 이 전쟁은 1905년 9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포츠머스 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전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볼세비키 혁명이 진행되었고 일본은 전쟁의 승리로 대한제국에 대한 정치, 군사, 경제적 실력을 행사했다. 고종황제 옆에 친일파 각료를 조직하고 용산에 일본군 2만 명을 상시 주둔시켰다.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을미사변 10년 후 1905년 11월 17일 일제에 강요로 을사늑약이 체결된다. 이토 히로부미가 야밤에 궁궐을 침범하여 강제로 체결된 것으로서 조약의 공식 명칭은 없고, 황제의 서명도 없는 괴문서이다. 그러나 핵심 내용은 외교권의 박탈과 통감부를 두어 조선을 지배한다는 내용이었다.
1905년 11월 17일 오후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를 데리고 이토 히로부미는 덕수궁 앞과 회의장 안에 완전무장한 일본군을 겹겹이 배치했다. 서울 시내에는 기병 8백 명, 포병 5천 명, 보병 2만 명이 위협 시위하며 궁궐 담장에 대포까지 설치했다.
고종이 완강히 버티자, 11월 18일 밤 1시 30분 이토 히로부미는 학부대신 이완용, 군무대신 이근택, 내무대신 이지용, 외무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찬성하는 서명을 하게 함으로써 조약이 가결되었다고 선포했다. 당시 조약을 승인한 이들을 을사오적이라고 부른다.
마침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통감부를 두어서 일제의 보호를 받는 보호국이 되었다. 일제는 한국의 목에 총칼을 겨누고 강제로 도장을 찍게 해서 나라를 넘기도록 강도질을 한 것이다. 다음은 을사조약 전문이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양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 공통의 주의를 공고히 하고자 한국의 부강지실을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하여 다음의 조관을 약정함.
1. 일본 정부는 일본 외무성을 통하여 금후 한국이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할 수 있고 일본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인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함(외교권 대행)
2. 일본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는 책임에 있어서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기로 함(외교권 박탈)
3. 일본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를 알현하는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아래 종래 재한국 일본 영사에게 속하였던 일제의 직원을 집행하고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일체 사무를 관리함(내정 간섭, 자치권 박탈)”
이 조약은 한국이 외교뿐 아니라 실제로 국권을 침탈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을사늑약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이 비통에 잠기고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상소를 올려 조약 체결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효과를 얻지 못했다.
민영환 등이 자결하였고 김하원, 이기범, 차병수 등이 ‘사수국권’이라는 경고문을 종로 네거리에 게시하고 구국 연설을 뜨겁게 외치다가 일제의 칼을 받고 부상을 입은 채 감금되었다. 황성신문사의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오늘이여 목 놓아 크게 우노라)을 사설에 내었다. 국민은 을사늑약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통곡하다 실신하고 까무러치고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고 음식을 먹지 못하고 끝없이 울분을 토해냈다.
나흘이 지나 11월 22일 고종은 황실 고문 헐버트에게 전보를 보내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양국 사이에 체결된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또 1907년 2월 일제의 차관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라는 사회운동이 시작되어 나라 찾기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범희 목사(㈔한국보훈선교단 이사장, 6.25역사기억연대 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