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회개로 첫사랑을 회복하라
성경
요한계시록 2장 1-7절
서론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풍경, 그리고 우리의 자화상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2천 년 전 터키 땅에 실재했던 교회들인 동시에, 역사 속의 모든 교회,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영적 현주소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편지를 보내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불꽃 같은 눈동자로 각 교회의 형편을 정확히 꿰뚫어 보시며, 때로는 따뜻한 위로를, 때로는 서늘한 책망을 던지십니다.
주님께서 소아시아의 수많은 교회 중 왜 하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셨을까요? 성경에서 숫자 7은 전체와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즉, 이 일곱 교회의 모습 속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대, 모든 교회의 영적 유형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고전 10:6),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을 비추는 영적 거울입니다.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세상 기준으로는 적은 능력과 궁핍을 겪고 있었으나, 주님 관점에서는 말씀에 순종하여 ‘부요한 자’라 칭찬받은 참된 생명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버가모교회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으나, 내부로 스며든 은밀한 세상과의 타협을 방치한 세속화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사데 교회는 외형적으로는 살아 있다는 화려한 명성과 브랜드를 가졌으나,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실상은 ‘죽은 자’라는 선고를 받은 영적 뇌사 상태의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부족함이 없다고 자만했지만, 정작 영적으로는 미지근하여 주님의 입에서 토해내고 싶을 만큼 영적 곤고함에 빠진 교회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의 외적 성장이 눈부셨으나, 세상의 유혹과 타협하는 영을 용납하여 내면의 변질을 겪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는, 진리 수호의 열정은 있었으나 가장 본질적인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냉랭한 지성주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일곱 가지 풍경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중 어느 자리에 서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눈부신 사역의 탑 뒤에 가려진 영적 메마름의 실체를 마주하고, “회개로 첫사랑을 회복하라”고 외치시는 주님의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를 소망합니다.
본문
1. 내가 네 수고와 인내를 아노니: 눈부신 사역과 열심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니”(계 2:1-3)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 전역에서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가 되는 거대한 메트로폴리스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3년 동안 눈물로 개척했고, 디모데와 사도 요한이 목회했던, 그야말로 정통 중의 정통인 영적 요람이었습니다.
이 교회를 향해 예수님은 자신을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로 소개하십니다. 주님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붙드시고, 친히 교회들 사이를 거니시며 성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시는 교회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그 주인의 눈에 비친 에베소 교회의 모습은 대단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다 안다고 인정하십니다.
히브리서 6장 10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를 잊지 않으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섬김, 이름 없이 드린 헌신, 주님의 이름 때문에 참고 견딘 인내를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단과 거짓 교사들이 판을 치던 시대 속에서 영적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6절에 보면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했다고 나옵니다. 니골라 당은 “한번 구원받았으니 육신으로는 무슨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고 속삭이던 세속주의, 영적 타협주의 무리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 거센 세상 풍조를 용납하지 않았고,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의 거짓을 철저하게 분별하여 드러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견뎠으며, 결코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겉보기에는 완벽한 교회였습니다. 바른 교리가 수호되었고, 이단 분별이 분명했으며, 사역의 열매도 가득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정통 보수 신학 위에 굳게 서서 끊임없이 봉사하고, 뜨겁게 헌신하는 모범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땀방울과 눈물 어린 수고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으시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2.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관계의 변질과 영적 함정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노라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3절까지의 눈부신 찬사에 이어, 4절은 청천벽력 같은 단호한 반전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노라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주님의 불꽃 같은 시선이 닿은 곳은 에베소 교회가 사역의 분주함 속에 잃어버린 치명적인 영적 구멍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처음 사랑’을 단순히 신앙 초기의 뜨거웠던 감정이나 눈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처음 사랑의 상실은 훨씬 더 깊은 ‘본질과 관계의 변질’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 처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인격적 사랑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관계의 본질입니다.
첫째, 행위의 동기가 바뀐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단과 싸우고 교리를 수호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역과 열심의 동기가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무, 책임감, 혹은 내가 이만큼 교회를 지켜냈다’는 자기 의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둘째, 관계의 중심에서 기능만 남은 것입니다. 마치 오래된 부부가 한집에 살며 가사 분담이나 경제 활동과 같은 기능은 완벽하게 수행하지만, 서로를 향한 따뜻한 사랑과 친밀한 대화는 실종된 상태와 같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봉사도 하지만, 정작 주님과의 인격적인 사귐과 은밀한 교제는 멈추어 버린 상태입니다.
셋째, 분별이 비판으로 변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을 의심하고 분별하다 보니, 어느새 교회 안에 날카로운 정죄와 비판만 남고 성도 간의 용납과 사랑이 메말라 버린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은 사랑 없는 신앙의 위험을 강하게 경고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아무리 바른 지식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신앙은 차가운 소리가 됩니다. 아무리 큰 헌신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주님 앞에서는 유익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도 말씀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지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지식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교만하게 만듭니다. ‘분별이 비판으로 변했다’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일어나면서도, 정작 본인은 알아차리기 어려운 교묘한 영적 함정입니다.
분별은 기준이 말씀에 있는 것이고, 비판은 기준이 자기 의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지 않고 남을 치는 무기로 쓰기 시작하면, 분별은 이미 비판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며 “이 말씀은 저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말씀 앞에 선 성도가 아니라 남을 재판하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3-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진정한 분별은 먼저 나를 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죄를 발견하고, 내 교만을 찢고, 내 안의 들보를 빼는 것이 먼저입니다.
또한 ‘다름’을 ‘틀림’으로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성격과 기질, 다양한 신앙의 색깔을 가진 이들이 모입니다. 건강한 분별은 복음의 본질은 지키되, 비본질적인 부분은 사랑으로 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말합니다.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바로잡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온유가 빠진 바로잡음은 회복이 아니라 상처가 됩니다.
분별은 죄는 아파하되, 죄인을 보면 눈물이 나고 어떻게든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반대로 비판은 죄인을 보면 분노가 치밀고, 그 사람의 바닥을 세상에 드러내어 정죄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마음입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사랑은 많았으나 분별이 없어서 세상과 타협함으로 망가졌다면, 에베소 교회는 분별은 잘했으나 사랑이 없어서 비판과 정죄의 얼음창고가 되어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엡 4:15) 진리는 반드시 사랑 안에서 붙들어야 합니다. 분별의 칼날은 사랑의 칼집에 꽂혀 있을 때 생명을 살립니다.
3.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라: 영적 리셋과 촛대의 경고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예수님은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를 향해 무서운 경고와 함께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하십니다.
첫째,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열심은 영적 궤도를 이탈한 것입니다. 무작정 앞으로 내달리는 속도를 멈추고,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졌는지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신앙의 회복은 남을 점검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시험하고, 내 믿음의 자리를 확인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다윗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이것이 영적 리셋입니다. 주님 앞에 멈추어 서서 내 마음을 살피는 것입니다. 내 열심의 동기가 사랑인지, 의무인지, 자기 의인지 정직하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둘째,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닙니다. 방향 전환입니다.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의 자리, 처음 감격의 자리, 처음 순종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 2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니.” 하나님은 처음 사랑을 기억하십니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순전함, 처음 은혜를 깨달았을 때의 눈물, 처음 십자가 앞에 엎드렸을 때의 감격을 기억하십니다.
셋째,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성경에서 촛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20절은 일곱 촛대가 일곱 교회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빛이 꺼진 촛대와 같습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교회의 존재 목적을 거두시겠다는 경고입니다. 더 두렵게는 주님의 임재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거두시겠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상 4장 21절에 “이가봇”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뜻입니다. 예배의 형식은 남아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날 수 있습니다. 건물은 남아 있어도 주님의 임재가 떠날 수 있습니다. 조직은 움직여도 성령의 생명력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편지를 받았던 에베소 지역은 현재 거대한 폐허와 돌무더기만 남은 고고학 유적지가 되었습니다. 찬란했던 영적 요람이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주님의 경고를 가볍게 여겼을 때, 역사 속에서 그 촛대는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4.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영광: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생명나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주님은 책망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회복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경고를 뒤집으면, 주님은 지금도 회개하고 돌이키는 심령 위에 다시 임재의 빛을 밝히시겠다는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10-12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처음 사랑의 회복은 성령의 회복입니다. 성령께서 다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실 때, 메마른 신앙은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첫째, 기능이 아닌 감격이 살아납니다. 성령이 부어지면 가장 먼저 내면의 동기가 바뀝니다.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억지로 하던 봉사와 예배가 감격과 기쁨으로 변합니다. 주님을 향한 첫사랑이 가슴속에서 다시 타오르기 때문에, 냉랭했던 가슴이 녹아내립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기만 해도 주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눈물이 흐르고,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둘째, 날카로운 비판이 눈물의 중보기도로 바뀝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불꽃 같은 눈동자가 남이 아닌 나를 향하게 됩니다. 내 안에 도사린 영적 교만과 추악함을 먼저 보며 가슴을 찢는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 후에 형제의 허물을 바라보면 분노나 비판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저 연약함이 바로 나의 모습이구나” 하는 긍휼의 마음이 생깁니다. 정죄의 얼음창고 같던 교회가 서로를 용납하고 치유하는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로 바뀝니다.
셋째, 세상의 압박을 이기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요한일서 5장 4-5절은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세상의 거대한 물질문명과 위협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믿음의 담대함이 생깁니다. 세상이 주는 안락함보다 주님 한 분이 주시는 평안이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영적으로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넷째, 진짜 영적 영향력이 나타납니다. 세상적인 힘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 타인을 통제하는 것에서 나오지만, 주님의 권세는 가장 낮은 곳에서 흐르는 생명의 법칙을 통해 나타납니다. 첫사랑을 회복한 성도에게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영적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비판의 메스를 내려놓고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이 그 사랑의 인력에 이끌려 찾아오게 됩니다. 주님은 이 영적 전투에서 이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생명나무는 창세기 2장 9절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인해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2장에 이르면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합니다. 죄로 인해 잃어버린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신다는 약속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끝까지 믿음으로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약속입니다.
결론
회개로 첫사랑을 회복하는 결단의 자리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거울 앞에, 그리고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불꽃 같은 메시지 앞에 섰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예배도 드리고, 봉사도 하기에 스스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데 교회처럼 “살아 있다”는 평판 뒤에서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두아디라 교회처럼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은밀하게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보다 에베소 교회처럼, 정통의 이름과 사역의 분주함 속에서 주님을 향한 뜨거운 감격과 첫사랑을 잃어버린 채, 형제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과 정죄의 메스만 휘두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꽃 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폐부를 살피시는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엄중히, 그러나 사랑으로 가득 찬 음성으로 외치십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라. 그리하여 처음 행위를 회복하라.”
요엘 2장 12-13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회개는 심판의 문이 아니라 회복의 문입니다. 주님께 돌아가는 자에게는 언제나 은혜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후, 부활하신 주님은 그에게 다른 것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신앙생활의 진짜 위기는 외적인 핍박이나 환경의 어려움이 아닙니다. 진짜 위기는 내면에 스며든 냉랭함이며, 거룩함과 사랑을 잃어버린 채 종교적인 껍데기만 남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거짓 열심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메마른 자리에서 돌이키는 영적 리셋, 곧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진짜 열심의 회복은 프로그램의 추가나 사역의 확장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임재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갈망하며 그분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비판의 칼날을 거두고 눈물의 중보기도를 시작합시다. 세상이 가르쳐주는 속도와 성공의 이정표를 과감히 꺾어버리고, 주님이 지시하시는 처음 사랑과 거룩함의 방향을 향해 우리의 삶을 재조정합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늘 주시는 이 세밀한 경고와 초청의 음성에 귀를 열고, 가슴을 찢는 회개를 통해 메말랐던 심령 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처음 사랑 위에 세워지는 진짜 영적 열심을 온전히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무리 기도
주님, 우리의 수고와 열심은 있었지만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이 식어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분별한다 하면서 비판했고, 진리를 말한다 하면서 사랑을 잃었던 우리의 마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어디서 떨어졌는지 깨닫게 하시고, 회개함으로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회복하게 하옵소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의 예배와 봉사에 다시 감격을 주시고, 교회가 사랑의 빛을 비추는 촛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