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본능은 윤리나 도덕의 규범을 뛰어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법으로 금하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선을 넘어가고 싶어 하는 본능이 꿈틀거린다. 이런 것은 우리 속에 있는 부패한 죄의 속성 때문이다.
그런데도 드물게 규범을 어겨 역사에 기록되고 회자하는 인물이 있다. 그중에 중세를 뒤흔들었던 엘로이즈(Heloise, 1100~1163)와 천재 수도사 아벨라르(Abelard, 1079~1142)와의 뜨거웠던 사랑의 스토리가 있다. 세상에는 이런 이야기가 흔하지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관심은 크게 달라진다.
아벨라르는 당시 최고의 천재로 논쟁에 있어서 그를 상대할 자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다양한 지식을 담고 있어도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은 부족한데, 아벨라르는 지식도 대단했고 그 지식을 조리 있게 표현하는 능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은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는데 한때는 5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스콜라철학의 아버지로 근세철학, 논리학, 언어학, 신학에 그의 이름이 빠짐없이 등장할 정도였다.
역사가 호이징거는 그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창조적인 학자로 12세기가 낳은 대학자라고 했다. 1117년에는 교황과 추기경 19명이 함께 그의 강의를 들었고, 50여 명의 주교와 대주교들이 일시에 그의 강의를 듣기도 할 정도였다. 그는 30대 중반에 당시 학문적으로 가장 차원 높은 노트르담 성당학교의 교수가 되어 15년 동안이나 강의를 지속할 정도로 탁월했다.
그런데 그 앞에 재기 발랄한 한 소녀가 나타났는데 그녀가 바로 엘로이즈였다. 그녀는 재기나 넘친 소녀로 라틴어,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문학과 철학, 신학에 정통하여 파리 전역에서 천재로 소문이 대단했다.
아름답고 명석한 그녀를 같은 성당의 참사인 삼촌, 퓌스베르는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아벨라르에게 조카의 가정교사를 부탁했다. 당시 엘로이즈는 16세, 아벨라르는 39살이었다. 23살의 나이 차이었고, 아벨라르는 수도사 신분이었기에 안심하고 부탁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자주 만나 소통하다 보니,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감정이 일어나게 되었다. 엘로이즈의 반짝이는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는 해박한 지성에 대한 존경심이 사랑으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아벨라르 역시 엘로이즈의 번뜩이는 천재성과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해맑은 눈, 그 눈을 맞추게 되자 정염의 파도가 폭풍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그 뜨거운 정염은 그 많은 지성과 학문, 윤리의식으로 제어할 수 없는 태풍이었다.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며 마음을 추스리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을 응시하는 천진난만하고도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해맑은 눈은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두 사람은 공부는 뒷전이고 거친 파도에 휩쓸려가는 돛단배처럼 뜨거운 정염에 몸과 마음을 내던지게 되었다. 약속된 찬란한 미래나, 사람들의 격정 어린 비난 따위는 염려할 여백도 없었다.
훗날, 아벨라르의 고백록에 의하면, 책은 펼쳐져 있지만 철학 공부보다 사랑에 관한 질문과 대답이 부지런히 오갔으며 학문에 대한 것보다 입맞춤이 더 많았다고 피력할 정도였다.
1년 동안 계속된 뜨거운 사랑은 결국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당시 수도사의 이런 행위는 사회에서 매장되는 일이었다. 신학자는 철저히 독신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이가 태어나자, 아벨라는 책임지기 위해 결혼을 강행했다.
결혼으로 아벨라르의 미래가 파괴될 것을 두려워한 엘로이즈는 무섭게 반대하였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가장 분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조카를 가정교사로 소개한 삼촌이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 되었다고 노발대발한 삼촌은 종을 시켜 잠들어 있는 아벨라르를 거세시켰다. 사회적으로 매장해 버리겠다는 의도였다.
두 사람은 결국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각각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수도원에 들어가서도 편지의 왕래는 지속되었다. 특히 엘로이즈는 소명이 있어서 수도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기에 아벨라르를 간절히 연모
하는 서신을 자주 보냈다. 그러나 아벨라르는 거의 답장하지 않았다.
한번은 엘로이즈가 머무는 수도원으로 찾아가 비밀리에 뜨거운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아벨라르는 맨손으로 일군 수도원을 그녀에게 넘겨주었고, 그 수도원을 위해 모금도 했다.
아벨라르가 63세로 세상을 떠나자 그를 사랑했던 수녀원장인 엘로이즈는 자신의 수도원에 그의 묘지를 쓸 수 있도록 요청했다. 아벨라르가 세상을 떠난 지 23년이 되던 해에, 엘로이즈도 아벨라르처럼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이런 시를 남겼다.
나는 가혹한 운명을 당신과 함께 모두 견디어 냈습니다.
청하오니 이제 당신과 함께 잠들게 하소서,
빛이 있는 쪽을 향하게 하시며 영혼을 자유롭게 하여 주소서.
그 후 1792년 엘로이즈가 원장으로 있었던 파라클레 수도원은 해체되었다. 그리고 25년이 되는 1817년, 엘로이즈가 세상을 떠난 지 654년 만에, 두 사람은 페르라세즈 공동묘지에 드디어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비로소 원하던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연모란 이처럼 오랜 기간을 담금질해야 하는 것이지 싶다. 엘로이즈가 절세미인이 아니었다면…
#한평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