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머물고 은혜로 걷다>는 44년 5개월간의 공직 목회를 마무리하며 은퇴를 맞이한 신관식 목사가 제주 법환교회에서 보낸 28년 10개월의 사역을 담아낸 신앙 에세이이자 영적 기록물이다. 서울에서의 안정적인 사역을 내려놓고 1997년 제주 서귀포 법환으로 내려온 저자는, ‘말씀의 법으로 돌아오는 곳’이라는 뜻의 법환(法還)이라는 이름처럼, 한 지역 교회에 깊이 뿌리내린 목회의 시간을 차분히 되짚는다.
이 책은 단순한 은퇴 회고록에 머물지 않는다. 저자가 매일 써 내려간 큐티(Q.T)를 토대로 한 목회 일기, 척박한 제주 땅에서 세계 선교로 뻗어간 사역의 여정, 그리고 장례와 은퇴의 자리에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며 기록한 시편 같은 글들까지, 총 3부 구성으로 한 목회자의 삶과 신앙, 공동체의 역사가 유기적으로 엮여 있다. 특히 저자는 스스로를 ‘속물 인간’, ‘못난 목사’라고 고백하며, 완성되지 않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어떻게 빚어져 가는지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책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제주 바다와 닮아 있다. 거칠지만 단단하고, 투박하지만 따뜻하다. 한경직 목사에게서 유아세례를 받고, 이응선 목사라는 영적 스승 아래서 신앙의 기초를 다진 저자는, 그로부터 받은 사랑을 법환교회 성도들과 나누며 긴 시간을 함께 걸어왔다. 2002년 월드컵 기념교회 완공, 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 사업, 제주 4·3의 상처를 보듬는 연합 예배 등은 이 책이 단순한 개인 기록을 넘어 제주 선교의 한 단면을 증언하는 이유다.
특히 3부 ‘성도를 노래하다’는 이 책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저자는 장례식마다 성도를 기억하며 써 내려간 ‘천국 환송시’와 은퇴하는 중직자들을 위한 시를 통해, 목회가 결국 ‘사람을 기억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이름 없이 교회를 지켜온 평범한 성도들의 삶이 문장 속에서 다시 살아나며, 이는 성도들에게는 소중한 유산이자 한국 교회에 던지는 조용한 질문이 된다.
저자는 은퇴를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라고 말한다. 법환교회 목회를 인생의 전반전으로 마무리한 뒤, 그는 다시 WEC 국제선교회의 순회 선교사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사랑으로 머물고 은혜로 걷다>는 과거의 성취를 정리하는 책이 아니라, 부르심 앞에서 여전히 걷고자 하는 한 신앙인의 고백이다. 제주의 바람과 파도처럼 잔잔하지만 깊은 이 기록은, 목회자뿐 아니라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하는 모든 이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