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종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가톨릭의 평신도 지도자인 이계성 전 교장은, 가톨릭 지도 신부님들이 ‘정의 구현 사제단’에 몸담고 있으면서, 반국가적 행동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매몰차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이들을 가리켜 ‘붉은 신부들’이라고 못 박았다. 나는 57년 전에 육군 보병학교에 있을 때, 여러 신부님들과 같이 생활해 보았는데, 참으로 훌륭한 분들이 많았다. 또한 故 이태석 신부는 남아프리카 톤즈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나환자들을 돌보며,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준 신부였다. 그는 사랑과 헌신의 삶을 몸소 증명해 낸 가톨릭 사제인 동시에 의사의 길을 걸으며,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의 삶에 대한 기록물이 TV와 언론에 공개되었고, 그의 생애를 다룬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를 만들어, 보는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다. 사람들은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아쉬움과 그의 순수한 인간애에 대한 진한 감동을 했던 것 같다.
우리 장로교회의 손양원 목사님은, 평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여수 애양원에서 참 목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공산당에 의해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를 순교자로 내주고, 장례식에서 ‘아홉 가지 감사’를 읊었던 성자였다. 그의 아홉 가지 감사 기록은, 한국칼빈주의 연구원 ‘칼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매월 한 번씩 모이는 C-Story 모임 때 손양원 목사님의 막내딸, 손동연이 남편과 함께 참석하고 있다. 일제 때 손양원 목사님은, 신사참배 반대 운동으로 5년이나 옥고를 치러야 했다. 또 6·25 때는 애양원의 나환자들을 지키려고 여수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 퇴각하는 공산당의 총에 맞아 과수원에서 순교했었다. 손양원 목사는 안용준 목사님의 표현대로 ‘사랑의 원자탄’이었다. 또 광주의 ‘오방 최홍준’ 선생은, 기독교의 복음을 몸소 실천한 분이시다. 그는 나환자들과 거지들 속에 들어가,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피고름을 짜면서 일평생을 살았다. 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실천한 한국 교회의 성자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대한민국과 한국교회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또 한 분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 이름은 김두영 목사님이시다. 그의 생애는 많이 알려진 바 없지만, 나는 그분의 음성과 그분의 설교를 들었고, 그분의 육필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김두영 목사님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6·25 때 평양에서 공산당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와 고난을 당하였고, 끝내 죽음직전까지 갔었다. 그럼에도 그는 공산주의 세력에 강하게 반대하였고, 1945년 해방 정국에 공산당을 대항하기 위해 서북 청년회를 이끌었던 대 지도자였다.
김두영 목사는 1917년에 태어나 17세에 신우초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1935년 기독 청년 평양노회 서기가 되어 면려 회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7년 그는 큰 뜻을 품고 일본 동경대학교 물리학을 공부했다. 그 후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에 16: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하고 졸업했다. 그는 와세다 대학 재학 중에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다 옥중에 갇혀 있는 ‘김선두 총회장’을 병보석 시켜 동경으로 모시고 왔다. 그리고 망명 중인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 주석 편집 위원장인 박형룡 박사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그는 일본에서 해방된 조국을 위해, 북조선 ‘건국 준비위원회’ 대표가 되어 정권 인수식에서 사회를 보고, 평양 기독교 종합 사무소 소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던 중에 舊 소련 정치국의 꼭두각시가 된 김일성 일당의 박해로 70일 동안 관 속에 있는 같은 좁고 어두운 곳에서 모진 고통을 받았고, 사형 직전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살아 월남하게 된다.
그는 당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학력과 최고의 지도자였지만, 1938년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 한 것에 실망하고, 공산주의 사상에 몸서리치면서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있는 총회 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 당시 총신학생들의 졸업생(통합 45회)이 100명이 넘었는데, 그중에 그는 반장이었다. 또 그는 피난민 교회를 돌보면서 옥호열 선교사와 담판을 지어, 피난자 목회자가 있는 모든 개척 교회에 지원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1962년 2월 8일, 당시 보사부 장관 정희섭 씨가 김두영 목사를 불러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소록도’에 있는 나환자들 수용소로 가달라고 했다. 병원 원장으로 있는 조창원 대령은 나환자들과 충돌만 일으킬 뿐 수습 방법이 없으니 김두영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 했던 것이다.
그래서 김두영 목사는 시무하고 있는 교회를 즉각 사임하고, 나환자들이 있는 소록도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김두영 목사는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하고 나환자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위로와 사랑 그리고 나환자들과 먹고 마시면서, ‘축산조합’ ‘사랑의 금고’를 만들고, 8개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그는 소록도를 천벌 받은 섬이 아니라, 낙원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나환자들은 십일조도, 감사헌금도 낼 수 없기에, 김두영 목사는 세 차례 해외 순방 집회와 국내의 부흥회로 받은 사례금 모두를, 나환자들의 복지를 위해 모두 쏟아부었다.
그렇게 김두영 목사는 나환자들의 피고름을 짜면서, 꿈과 희망을 주어 함께 살기를 30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졸업생이요, 총신 제1회 반장이었던 그가, 그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감내하면서 결국 ‘소록도 나환자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런데 슬픈 것은, 요즘 목회자들은 자신의 안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부정과 부패가 판치고, 교회의 세속화 시대에 세상의 부귀와 영화, 다 버리고 소록도 나환자들의 영혼을 위해 30년을 헌신하신 김두영 목사님의 아낌없는 사랑과 헌신을 다시 기억한다.
#정성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