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예루살렘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을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모여 주님을 기념하는 성찬을 하며, 진정으로 삶을 나누는 공동체 였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성도가 서로 서로 자신의 삶을 나누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평신도 사역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대중목회에서 소그룹목회로 전환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부흥의 기준을 모이는 숫자로 평가를 합니다. 주일에 몇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는가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건강해지려면 소그룹이 활성화돼야 하고 소그룹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대중목회에서는 나눌 수 없는 자신만의 아픔과 고민을 깊이 있게 나눌 수 있도록 소그룹목회로 시스템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깊이 있는 나눔을 이끌어갈 수 있는 소그룹 리더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의 교회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삶을 나눌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역예배가 그것을 감당해야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입니다. 저 사람은 신앙생활 열심히 하니까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의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고, 한숨과 절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의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아픔과 슬픔을 공유할 수 있고, 나눔으로 치유 받을 수 있어야 진정한 공동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공동체는 일과 지식과 사역만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인격과 삶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시스템으로는 일에 대해서는 터치할 수 있으나 관계에 대해서는 터치할 수 없습니다. 투명하고, 정직하고, 열려있고, 따뜻하고, 포근한, 이런 깊이 있는 관계까지 들어가는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와 그 당시 다른 많은 종교집단과 다른 것은 초대 교인들이 서로 모여 두루마리 책을 읽고, 기도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 당시 많은 종교인이 그러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달랐던 것은 삶을 나누는 공동체를 통하여 관계에 혁명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서로 영향을 받고, 신뢰하는 관계를 맺고, 그들의 소유까지도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신도 사역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주일 목회에서 매일 목회로 전환해야 합니다. 주일만큼 주중의 삶도 중요한 것입니다. 주일도 하나님의 날이고 평일도 하나님의 날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하나님께 드림으로 나머지 주중의 날도 하나님께 속했다고 인정하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왜 십일조를 드립니까? 1/10은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 9/10는 내 것입니까? 아닙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10/10 모두가 하나님의 것인데 십일조를 드림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진지하게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교회가 주일 목회에서 매일 목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세로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평신도 사역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오는 교회에서 가는 교회로 전환해야 합니다.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불러 모았다는 뜻입니다. 즉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 받아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죄악 많은 세상에서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가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것에 머무르니까 세상과 담을 쌓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교회일수록 세상과 거리를 멀리 두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아주 중요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도성이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무슨 뜻입니까?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이지만, 세상으로 파송된 하나님의 대사이기도 한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21세기 교회는 오는 교회에서 가는 교회로 전환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침체기를 지나 쇠퇴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사도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담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열려있어야 하는데 우리들 끼리 모여서 담쌓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찬송과 기도와 우리들의 교제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세상은 우리가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보고 교회를 평가하고, 예수님을 평가하고, 하나님을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이끌고 가기 위해서는 교회인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강한 군사로 양육하여 세상으로 파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라나타라는 말씀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언제 오시나요?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마태복음 24장 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온 세상에 천국 복음이 전파되면 종말이 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2절과 33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말로 그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상에 선교하기 가장 어려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천국 복음이 이스라엘로 가는 길목에 누가 있느냐 하면 이슬람 국가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이러한 이슬람 국가들에 속해 있는 모슬렘들을 누가 전도해야 할까요?
앞으로는 목사, 선교사 타이틀로는 이러한 나라들에 들어가서 선교하기가 하늘에 별 따는 것처럼 힘든 일입니다. 이들 나라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려면 평신도 사역자들을 훈련시켜 파송시키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선교의 기회는 비즈니스 세계에 있습니다. 세계 빈곤 지도와 세계선교 지도를 겹쳐서 보면 경제가 가장 낙후된 지역이 복음화가 가장 덜된 지역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복음화가 덜된 지역은 대개 선교사에게는 지독히 폐쇄적인 반면 사업가라면 누구에게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습니다.
세계인구의 20퍼센트가 이슬람국가에 살고 있지만 이슬람국가의 무역량은 세계무역량의 2퍼센트 밖에 안됩니다. 지금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역사상 유례없는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어떤 국가도 비즈니스에 문을 닫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 거대한 기회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충분히 준비하여 그 문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선교사에게 닫혀있던 국가들도 사업을 하기 위해 오는 그리스도인은 환영합니다.
선교학자들은 가장 전도가 덜된 10/40창을 자주 언급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10/40창에는 이미 현재의 선교 인력을 여섯 배로 늘릴 만큼 많은 크리스천들이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을 효과적인 선교 인력으로 키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10/40창에 있는 모든 교단과 선교기관의 선교사들을 다 합치면 약 4만명 정도가 됩니다. 10/40창의 세속분야에 일하는 미국인의 숫자만 무려 200만명이 됩니다. 만약 이 숫자의 1/3만 전도에 열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한 푼의 선교비용 추가 없이 전도자의 숫자가 4만명에서 24만명으로 확 늘어날 것입니다.
평신도 사역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들만 소명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목사, 전도사, 선교사로 부름 받은 것은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르심만이 소명이고, 평범한 일상의 세속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부름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직업을 뜻하는 Vocation은 “부르다”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나왔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세속적인 직업이든, 성직이든 모든 직업은 소명 곧 하나님의 세상 돌보기에 동참하라는 부르심으로 보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이렇게 물어보셔야 합니다. 하나님! 저를 어디에 부르셨습니까?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주부라면 이렇게 생활해야 합니다. 나는 주부의 일을 하는 목사다 라고 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교사라면 이렇게 생활해야 합니다. 나는 교사의 일을 하는 목사다 라고 해야 합니다. 내가 학생이라면 나는 학생의 일을 하는 목사다 라고 생활해야 합니다.
만약 모든 크리스천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모든 성도가 자신의 직장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복음 전파의 장으로 여기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한다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세상을 복음으로 덮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잠언 22장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골로새서 3장 22절과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았다는 자세로 일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이 세상의 믿지 않는 왕들 앞에서 인정받는 자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요셉이 그러했고, 다니엘이 그러했고, 이스라엘이 가장 타락한 시기였던 아합 시대에 오바댜가 그랬던 것입니다.
#김흥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