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팔복(八福)에서 복된 자들의 특성과 그들의 받을 복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마태복음 5장3절-12절). 그 중 특히 눈에 띄는 복된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이다. 다른 복된 이들이 받을 복들이 복 있는 자의 어떤 특성과 연관된 상급인 것과 달리, 긍휼히 여기는 자는 분명하게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누린다고 한다. 그래서 긍휼이라는 복된 특성은 매우 독특하게 구별되며 다른 복들과 배타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긍휼(矜恤)의 사전적 의미는 ‘가엽게 여겨서 돕고자 하는 마음’, ‘불쌍히 여겨서 돌보아 주고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한다. 공감이 다소 지적이고 정서적인 특징을 갖는다면, 긍휼은 더 근원적이고 애끓는 심정의 행동까지도 포함되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보다 애타고 감당할 수 없는 상한 마음과 그 마음의 표현 말이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고(마태복음 9장36절), 맹인을 보시고도 불쌍히 여기셨다(마태복음 20장34절).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각색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친히 몸으로 치유해 주셨던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긍휼히 여기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럴 때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하신다.
긍휼히 여기고 여김을 받는 복 된 가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깊은 영적인 진정성이 필요하다. 신경 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타인의 행동을 따라 하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적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 뉴런은 타인의 모든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어떤 의도된 행동을 볼 때 자극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거울 뉴런이 자극될 때 이 안에서 공감과 감정 조율의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 타인의 겉치레 행동이 아닌 그 안에 어떤 깊은 뜻이 있음을 발견할 때 마음이 동하고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단지 공감적인 체를 하거나, 말로만 위로하는 형식으로는 거울 뉴런이 자극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타인의 행동이 나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것으로 경험될 때 우리는 하나 됨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은 단지 동정하거나, 공감하는 척하거나, 겉으로는 불쌍히 여기지만 속으로는 내가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긍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러한 긍휼을 베풀 때, 그 긍휼히 여김을 받는 대상은 거울 뉴런이 자극되고 진심을 알아차리게 되며, 그 선한 자극은 다시 부메랑처럼 베푼 이에게 돌아오는 ‘긍휼의 선순환’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뇌과학자들은 우리의 장기(臟器)들은 단지 소화기관의 역할만이 아닌, 가슴 깊이 우러나는 느낌과 같은 근원적인 감정을 공감할 수 있는 채널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애끓는 심정’이나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은 단지 건조한 단어의 나열이 아닌 온몸과 영혼의 경험이며, 예수님은 이와 같은 심정으로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그 자체가 복의 시작이 되어 결국 동일한 깊은 긍휼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아기로 오시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대림절이다. 어느 때보다 긍휼함을 생각하고 행하는 계절이다. 사방으로 흩어진 몸과 마음을 정돈하여 긍휼히 여기는, 몸으로 행하는 복을 나누자. 그 안에서 어느새 긍휼함을 받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을 믿으며 말이다. 지금은 그런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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