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정치적 사면, ‘블랙홀’에 빠진 광복 8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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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에서 벗어난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는 광복절이다. 교계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일제히 기념 메시지를 발표하고 투철한 애국애족 정신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나갈 것을 다짐했다. 정부도 광복절 80주년 기념식과 별개로 진행하는 이재명 대통령 ‘국민임명식’을 계기로 국민 통합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런데 광복절을 앞두고 이 모든 걸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게 있다. 바로 정부가 발표한 광복절 특별사면 명단이다.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8월 15일 자로 특별사면 복권이 된 국민은 총 83만6687명이다. 일반 형사범이 1922명으로 가장 많고 정치인 및 주요 공직자, 경제인, 노조원 등이 뒤를 이었다.

문제는 이번 사면에 지난 정부에서 형이 확정된 정치인 등 주요 여권 인사들이 대거 포함된 점이다.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 부부를 비롯해 윤미향 전 의원, 조희연 전 교육감, 은수미 전 성남시장,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 등이다.

조 전 대표는 자녀 입시 비리와 청와대 감찰 무마 등 혐의로 징역 2년 실형이 확정됐다. 부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 또한 아들의 입시 관련 서류를 위조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이 확정됐다. 윤미향 전 의원의 경우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후원금을 횡령한 혐의로 의원직 상실에 해당하는 형을 받았으나 재판을 질질 끌다 4년 국회의원 임기를 다 마쳐 호된 비판을 받았다.

조 전 대표 부부가 저지른 입시 비리는 우리 사회에 불공정과 불의의 대명사로 깊이 각인됐다. 그런 비리를 저지르고도 반성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더구나 아직 형기에 32% 정도만 채운 정치인을 광복절 특사로 풀어주고 전과 기록까지 말소해 완전한 면죄부를 안기는 게 국민 통합인가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다.

윤미향 전 의원도 심각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들어온 후원금을 착복해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을 다른 날도 아닌 광복절을 기해 사면 복권하는 게 과연 시대 정신에 부합한 지 의문이다.

이밖에도 해직 교사 부당 특채 혐의로 유죄가 확정된 조희연 전 교육감,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은 은수미 전 성남시장, 택시 기사를 폭행하고 증거를 인멸해 유죄 판결을 받은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 등 그 면면이 실로 화려하다. 이들의 사면 복권이 광복절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다.

국가경축일에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단행하는 건 오랜 관행이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들의 첫 사면 대상은 주로 민생 사범이었지 정치인들은 그 대상이 아니었다. 집권 초기에 정치적 특혜와 보은 시비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대통령 취임 두 달 만에 사회가 용인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유명 정치인을 대거 사면한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정부와 여당은 “국민 통합이라는 시대 요구에 부응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하지만 입시 비리, 후원금 횡령, 뇌물수수, 택시 기사 폭행, 교사 부당 채용 등의 범죄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건 국민 통합이 아니라 국민 분열 조장에 더 가깝다. 그러니 대통령이 사면권을 정치적 이해관계에 남용한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거다.

야당은 이번 사면에 반발해 8·15 광복절에 열리는 ‘국민임명식’에 불참을 통보했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도 불참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노총 양경수 위원장은 국민임명식이 아닌 양대 노총 결의대회에 참석한다고 밝혔다. 결국, 대통령의 정치적 사면에 따른 후폭풍이 광복절 80주년을 겸해 마련된 국민임명식에까지 몰아치는 모양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지난주까지만 해도 60% 중반을 기록했던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가 취임 후 가장 큰 폭으로 하락했다. 지난 11일 리얼미터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 대통령의 국정 수행 긍정 평가는 56.5%로 전주 대비 6.8%포인트 하락한 최저치를 기록했다.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광복절 특별사면이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일 것이다.

그런데도 여당 내부에선 대통령의 특별사면에 대한 여론이 크게 나쁘지 않다며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고 있다. 지지율이 떨어진 요인이 경제 문제, 부동산 대책의 정책적 혼선과 폭염과 수재 때문이란 거다. 경제·부동산 문제가 현 정부만의 이슈가 아니고 폭염과 수해도 점차 해소되는 상황인데 이걸 대통령 지지율 하락에 꿰맞추는 건 구차한 변명이다.

문재인 정권은 입시 비리로 전국민적인 지탄을 받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끝까지 감싸다 야당에게 정권을 내주는 철퇴를 맞았다. 끝까지 ‘내로남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 여당 내부의 인식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국민 통합이란 명분으로 거창하게 준비한 국민임명식이 대통령의 정치적 사면에 대한 야당의 반발로 반쪽행사로 치러지게 되자 대선 불복이라며 되려 야당을 향해 총공세에 나선 모습이 그렇다. 그러면 3년 전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때 민주당이 불참한 것도 대선 불복이었나.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권력은 오래가봐야 10년이고,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 동안 붉게 피어 있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권력의 무상함을 표현한 말로 그 어떤 권력도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모든 걸 잃게 마련이다.

온 국민이 함께 기려야 할 역사적인 날인 8.15 광복 80주년이 정치적 사면 논란으로 그 의미가 퇴색된 건 새 정부에 두고두고 무거운 짐으로 남게 될 것이다. 국민 통합의 좋은 기회를 도리어 국민 분열의 씨앗을 뿌리는 꼴로 만들어 버렸으니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