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회총회재판 참관기] 퀴어집회에서 축복식을 행한 것은 성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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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온순 목사(원천교회 담임)
원천교회 담임 박온순 목사

2025년 8월 7일(목) 오후 1시 30분에 일영에 있는 감리교본부 교회에서 피고인(상소인) 김형국, 차흥도 목사에 대한 항소심이 열렸다. 이들은 2024년 6월 1일 서울퀴어집회에서 축복식을 행하여 교리와 장정 1403단 3조 8항, ‘동성애를 옹호 찬성하는 범과’에 해당하여 충북연회에서 출교를 당한 후 총회에 상소하였기에 마지막 심문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2019년 인천퀴어집회에서 축복식을 행하여 출교를 당한 전 감리교목사였던 이동환 씨에 대한 재판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직간접적이라 함은, 해당인에 대하여 직접 고소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사건을 맡은 연회에 증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동환씨가 총회에 상소하여 출교를 당하기까지 약 5년여 지난한 재판기간 중에 각 연회와 총회의 재판위원들은 성경대로, 교리와 장정대로 판결할 것을 촉구하는 기도회를 광화문 본부 앞에서 인도하였었다. 그로 인해 변*권이라는 목사는 페이스북에 내 이름의 초성으로 “ㅂㅇㅅ은 빨리 뒈지라고 기도하고 있다”라는 글의 제보를 받기도 했었다. 그 외에도 퀴어집회와 관련된 자들의 냉소와 비난과 저주를 받으면서도 왜 이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존귀하시고 거룩하신 성 삼위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시기 때문이다. 티끌에 불과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며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과 본체와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능멸을 당하는데 어찌 침묵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강권하심을 통해 침묵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퀴어집회에서 축복식을 행한 것은 목사의 임무(상무)다?

피고소인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목사가 그 대상이 누구든지 축복할 임무가 있다는 것이다. 퀴어집회에 가서 축복식을 행한 것은 목사의 임무 중 하나로서 그러한 행위를 하였다고 동료가 출교를 당하도록 고소하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다. 또한 성경의 가르침대로 그 누구라도 차별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인데 왜 그러한 행위가 재판을 받고 출교를 당하는 것이어야 하느냐, 라고 항변한다. 듣다보면 그럴듯한 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재판을 맡은 분들도 혼란스럽겠구나, 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목사가 누군가를 축복하기 이전에 가장 먼저 행해야할 임무는 무엇일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닐까? 성경전체의 가르침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중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 있을까?

내가 이 일에 관여하게 된 분명한 동기가 있다. 이 문제로 출교를 당한 이동환씨가 2019년 퀴어집회에서 온갖 난잡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성적 취향을 과시하며 즐기고 있는 괴상한(퀴어)집회에서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꽃잎을 뿌리며 축복식을 행하는 동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 당시 그가 행하는 참망함에 대하여 내 영혼의 탄식과 깊은 슬픔은 그 어떤 것으로도 지금까지 표현할 수가 없다. 다만 그 이후로 밥을 먹다가도 눈물이 나고, 운전을 하는 중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 길가에 세워놓고 한참을 울다 가던 길을 가곤했다. 주님의 이름이 이렇게 모욕을 당하는데도 주님을 위해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능함 때문에 깊은 슬픔에 잠기곤 했던 것이다. 그나마 깊은 탄식 속에 하나님께 대신 회개하며 저들의 회개를 촉구하며 기도할 것밖에 없다는 생각에 광화문 광장, 본부 앞으로 뛰쳐나가 기도회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회개가 아니라 자신들의 옳음을 주장하며 더욱 강퍅해 졌고 그 세는 더해가면서 작금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모태신앙인이다.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나 20세가 되기까지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셨다. 주일을 지키지 않고 헌금을 드리지 않으면 혼날 것 같은 무서운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어떤 계기로 인해 20세 때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전 존재적으로 경험하면서 나의 인생관도 삶의 방향도 가치관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그때부터 내 삶의 이유는 하나님의 명예와 존귀하신 이름과 그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전부를 바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꿀 송이와 같이 달콤하다. 거룩하신 그 이름을 높여 드리기 위해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어 올려드려도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더해만 간다. 그 목마름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비에 새기는 것으로 채워짐을 경험한다. 그 새겨진 말씀을 따라 어린아이도, 장애를 입은 분들도, 호흡이 있는 모든 인생들을 존재자체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지는 것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들풀도 소중하고 미물들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에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하나님의 솜씨를 드러내고 있기에 그 능력과 권세를 즐기는 것이다. 이 또한 생태신학 운운하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연인이라는 등 낭설을 퍼트리며 피조물을 신격화하는 자들과는 다르다.

 2. 퀴어집회에서 축복식을 행한 것은 성경대로 이웃사랑을 행한 것이다?

상소인들의 진술을 듣다보면 사람들이 미혹당하는 이유를 알 듯하다.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퀴어집회에 가서 축복식을 행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이웃사랑을 실천한 것이란다. 그것이 왜 잘못이냐, 라고 항변 할뿐 아니라, 고소인(피상소인)들을 극우로 몰아가며 율법주의자들이며 성경에 대해 무지하고 반지성적인 자들이라 온갖 말로 폄훼한다. 그러나 과연 상소인들이 동성애자들의 집회에 가서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한 것이 과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이웃사랑일까? 누가 율법주의자일까? 또한 총회에 상소한 자들의 행보가 왜 출교에 이를 만큼 반성경적이고 반 기독교적인지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 상소인들의 주장에 대해 성경은 우선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이며, 그 사랑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 것인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확하게 답을 주셨다.

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에는 예수님을 시험하며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찾아온 율법교사가 등장한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한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답변을 한다.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하시니 그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여쭙는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인지, 먼저 사랑해야 할 이웃에 대해 소개해 주셨다. 모든 인간은 마귀(강도)에게 강도당한 자들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8:42-45)라고 답변하셨다. 유대인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요8:48)라고 반문하였다.

폐일언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이웃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이라 조롱한 것과 같이 성육신 하실 때부터 짐승 취급받으시며 말구유에 탄생하셨던 성자 예수 그리스도시다. 강도 만난 우리네 인생들을 위하여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사랑해야 죽은 영혼이 살아나서 볼 것을 보게 되고 말할 것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이웃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사랑해야 한다.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주님이 명하신 계명은 무엇일까?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신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
“동성애는 죄다,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라고 가르치는 것이 이웃사랑이다!

“동성애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요 죄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레18:22, 고전6:9-10)라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 복된 소식을 전함으로 나(목사)도 살고 동성애에 빠진 영혼이 회개할 기회를 얻어 그들의 영혼을 살리는 것이다. 이는 동성애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심과 같이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3. 교단의 정치가들과 한쪽으로 치우친 언론을 등에 업는 것이 힘인가?

퀴어집회에서 축복식을 행한 상소인들은 물론 배후에서 이를 조종하는 자들은 더 이상 언론과 배후의 정치적인 힘과 지위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하지 말라. 상소인들이 재판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 원로 목회자들과 전직 감독회장, 전 감신대 총장 및 감독이 반성경적이고 반 기독교적인 상소인들의 행태에 대하여 오히려 두둔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뿐 만이 아니라, 재판이 끝난 다음날인 8월 8일에는 뉴스엔 조이를 통해 “감리회목사출교재판비용으로 쓰인 여선교회선교헌금”이라는 제하의 자극적인 글을 통해 감리회의 진리와 거룩성 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단체를 왜곡 보도하였다. [감리교동성애대책통합위원회]는 그나마 감리교회의 희망을 보여주는 단체다. 위에 적시한 바와 같이 감리교회를 바르게 인도해야할 전직 신학교 총장이나 감독회장, 감독들이 나서서 반 성경적이고 반 기독교적인 행보를 보이는 목사들을 권면하고 바로 인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 하는 상황이 수십 년 동안 보인 감리교회의 악행이었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소수의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분연히 일어나 진리를 회복하고 본질로 돌아가기 위한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단체들이 세워졌다. [감리교동성애대책통합위원회]의 회원들 역시 자신의 물질과 시간을 드려 섬기는 그러한 단체 중 하나다. 또한 어머니의 마음으로 감리교회가 진리에서 떠나 한쪽으로 치우쳐 그리스도인의 근심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며 염려하며 기도하는 여선교회가 귀한 물질을 드려 선한 일에 협력한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교회로부터 선교비를 받으며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뉴스엔 조이라는 인터넷 언론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선한 일을 도모하는 교회와 단체에 악평을 쏟아내며 기사를 쓰는 저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 왜 뉴조는 감리교회에서 출교를 당한 이동환에게 무지개 상을 수여한 무지개신학 연구소며, 전직 교수로서 이단적인 사상으로 출교당한 변 **교수의 제자라 칭하는 자는 “스승을 못 지켰으니 제자는 지킨다”며 공개적으로 재판비용을 모금한 행태에 대해서는 왜 비판하지 못하는가?

4. 결론

회개하면 될 것을 자꾸만 변명하고 회피하려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멀어져 간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길 소망한다.

#박온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