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21일, 1968년 암살된 시민권 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 관련된 약 23만 쪽 분량의 기밀 문서를 전격 공개했다. 문서에는 연방수사국(FBI)의 내사 자료와 수사 메모, 킹 목사의 암살범으로 지목된 제임스 얼 레이의 감방 동료 진술, 중앙정보국(CIA)의 관련 정보 등이 포함됐다.
털시 개버드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이번에 공개된 문건에는 암살과 관련된 단서와 사건의 경과, 제임스 얼 레이와의 연관성을 시사하는 다양한 정황이 담겨 있다"고 밝혔다. 일부 문건은 1976년 FBI와 1979년 미국 하원 암살특별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WP)는 문서 공개 직후 초기 검토 결과를 전하며, FBI의 킹 목사에 대한 감시 활동이나 레이 외에 또 다른 공모자의 존재를 입증할만한 새로운 정보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번 공개는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초 서명한 행정명령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는 킹 목사뿐 아니라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과 동생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 관련 문서도 단계적으로 공개하도록 지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3월과 4월에 각각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F. 케네디 관련 일부 문건이 공개됐고, 이번 킹 목사 문서 공개로 일련의 조치가 마무리된 셈이다.
하지만 킹 목사의 유족들은 이번 공개가 오히려 선친의 명예를 훼손하고 시민권 운동의 성과를 왜곡할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아들 마틴 루터 킹 3세와 딸 버니스 킹은 공동 성명을 통해 "아버지의 유산을 공격하고, 거짓된 정보를 유포하려는 시도에 단호히 반대한다"며 "이번 문서들은 반드시 온전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특히 FBI가 당시 국장 에드거 후버의 주도로 킹 목사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허위 정보를 흘려 불안을 조장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감시로 수집된 도청 자료나 사생활 관련 정보가 부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했다.
실제로 1977년 미 정부는 킹 목사의 자택과 사무실에서 수집한 도청 기록과 녹취록, 기타 문서를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 넘기고, 2027년 1월 31일까지 50년간 비공개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이번 공개된 23만 쪽 문서에는 이러한 감시 기록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1964년, 킹 목사의 부인 코레타 스콧 킹은 남편이 다른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내용이 담긴 음성 파일과 편지를 전달받았다. 이는 FBI가 후버의 지시에 따라 작성한 것으로, 나중에 사실로 드러났다. 해당 도청은 당시 법무장관이던 로버트 F. 케네디의 승인을 받은 것이었으며, 언론에 전달됐지만 보도되지는 않았다. 같은 해 말, 킹 목사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킹 목사 가족은 FBI가 암살 사건 자체에 개입했을 가능성도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자녀들은 이번 문서가 과거 의혹을 해소하거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지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킹 목사의 조카딸 알베다 킹은 이번 공개를 "진실을 향한 역사적 한 걸음"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일부 인사들은 킹 목사 문서의 공개가 진실 규명보다는 정치적 목적이 앞섰다고 지적했다. 흑인 인권운동가 앨 샤프턴 목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킹 관련 문건을 공개한 것은 단순한 주의 환기용"이라며 "정작 제프리 엡스타인 성범죄 사건에 대한 문건은 공개하지 않으면서 진정성을 논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초 엡스타인 관련 문건 공개를 보류한 데 이어, 법무부에 대배심 증언 공개를 요청하도록 지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킹 목사 문서 공개가 엡스타인 사건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기 위한 시도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킹 목사를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제임스 얼 레이는 체포 당시부터 줄곧 무죄를 주장해 왔다. 킹의 아들 덱스터 킹은 1997년 교도소에서 레이를 만나 "당신이 한 일이 아니라 믿는다"고 말하며 가족의 입장을 전했다. 이후 뉴욕 변호사 윌리엄 페퍼는 레이가 머물던 건물 내 술집 주인 로이드 조워스를 포함한 공모자들이 정부와 연계됐다는 주장을 담아 민사 소송을 제기했고, 1999년 멤피스 배심원단은 조워스에게 살인 혐의가 있다고 평결했다.
이에 킹 가족은 클린턴 행정부에 재수사를 요청했고, 법무부는 배리 코왈스키 차관보의 지휘 아래 조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코왈스키는 "철저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레이 외에 다른 공모자가 있었다는 신뢰할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킹 목사와 관련한 저서를 다수 출간한 작가 제임스 더글러스는 "미국 정부가 킹 목사 암살에 연루됐다는 정황은 과거부터 충분히 존재했다"며 공개 문서를 통해 진실이 더 명확해지기를 기대했다. 또한 하원 위원회의 수석 조사관이었던 G. 로버트 블래키는 "정부 기관이 연루되었더라도, 1979년 이전에 관련 증거는 대부분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