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단지 아름다움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때로는 그것이 전쟁의 무기가 되어, 이념을 주입하고 증오를 선동하며 역사의 비극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모한다. 『전쟁과 디자인』(고유서가)은 바로 이러한 디자인의 정치적, 역사적 기능을 정면으로 파헤친다.
이 책의 저자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저술가로, "디자인에는 죄가 없다"는 전제를 두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따라 사회와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강조한다. 특히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디자인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권력과 이념을 전달하고 사람들의 감정과 행동을 조종하는 수단이 되어 왔다.
책은 총 네 장으로 구성된다. 1장에서는 색채가 전쟁에서 어떻게 상징으로 작동했는지를 다룬다. 붉은색은 공산주의와 혁명의 열기를 상징했고, 검은색은 나치 독일의 공포를 표현했다. 국기, 군복, 포스터에 이르기까지 색은 단순한 미적 요소가 아닌, 이념과 권력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2장은 시대와 맥락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달라진 상징들을 조명한다. 나치의 하켄크로이츠(卍), 유대인의 다윗의 별, 러시아의 푸틴 정권이 사용하는 'Z' 마크 등은 정치 권력에 의해 재디자인되며, 그 기능과 해석 역시 변화해 왔다. 상징은 언제든지 정치적 무기로 바뀔 수 있다.
3장에서는 언어가 시각적으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분석한다. '특별군사작전', '비국민', '하일, 히틀러!' 같은 표현은 그 자체로 사고를 멈추게 하고 행동을 이끌어내는 선동적 언어였다. 저자는 "말조차도 시각화되어 선전의 도구가 된다"고 지적한다.
4장에서는 이 모든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며, 시각 디자인이 전체주의 정권과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설명한다. 히틀러가 요리사 복장으로 포스터에 등장해 인간적인 이미지를 부각시켰고, 여성 병사는 성적 매력을 강조한 선전물로 활용됐다. 시각적 감각은 언제나 이념을 은폐하거나 강화하는 데 동원되었다.
『전쟁과 디자인』의 진가는 방대한 시각 자료와 함께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던 디자인이 어떻게 무의식을 통해 권력을 강화해 왔는지를 통찰하는 데 있다. 이 책은 단순히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서가 아니라, 정치와 감각, 기호와 폭력이 얽힌 문화사로 읽힌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일상에 스며든 시각 언어 속에 숨어 있는 권력의 흔적을 직시하게 된다.
책은 조용히 묻는다. 디자인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죄의 도구로 만든 손과 눈, 그리고 말은 누구인가.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잘 디자인된' 악과 마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