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 우리의 노동과 창작, 시간을 흡수해 데이터를 만들고, 그것을 통계와 알고리즘으로 가공해 다시 우리에게 되돌린다. 이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문장은 옥스퍼드대학교 인터넷연구소 연구진이 펴낸 책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흐름출판)의 핵심 문제의식을 함축한다.
이 책은 마크 그레이엄, 제임스 멀둔, 캘럼 캔트 등 옥스퍼드대 연구진이 공동 집필한 인공지능 비판 보고서다. 저자들은 AI를 단순한 기술이 아닌 '추출 기계(Extraction Machine)'로 정의한다. 인간의 지식, 감정, 노동, 창의성을 추출해 데이터를 만들고, 이를 알고리즘으로 재가공해 수익을 창출하는 구조적 시스템이라는 설명이다.
AI는 결코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AI 기반 서비스들은 수많은 보이지 않는 노동의 결과물이다. 이미지 태깅, 클릭, 콘텐츠 분류 등 반복적인 데이터 라벨링 작업에 수많은 인간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이들의 시간과 에너지, 감정까지도 AI는 흡수하고 있다. AI는 마치 자율적 기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육체와 판단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러한 AI 구조가 단지 효율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노동을 은폐하고 통제하며 인간을 추출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메커니즘이라고 비판한다. 알고리즘은 중립적인 계산 장치가 아니라, 특정한 세계관과 권력 관계를 구현하는 코드라는 점에서 특히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이 같은 구조를 '디지털 식민성(digital colonialism)'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자원과 노동을 수탈해 부를 축적했듯이, 현대의 빅테크 기업들은 글로벌 남반구 국가들에서 데이터를 추출하고 노동을 전가하면서, 북반구에서 수익을 실현하는 비대칭적 구조를 고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이러한 AI 추출 구조는 단지 창의성의 약탈이나 노동 착취를 넘어서, 불평등을 고착화하고 민주주의 질서 자체를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연구진은 실제 사례 7건을 통해 AI 기술이 어떻게 권력을 재편성하고 인간 주체성을 소외시키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단지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시민사회가 기술 감시에 대해 어떤 권한을 가져야 하는지, 알고리즘의 설계가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플랫폼 노동자가 어떤 법적 보호 장치를 통해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기술의 진보가 인간 존엄과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회적 대안들을 모색하는 것이다.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는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의 화려한 외피 아래 존재하는 구조적 불평등과 새로운 형태의 착취 메커니즘을 드러내며,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사유를 요구하는 선언문이자 분석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