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9:21)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명령은 궁극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직(discipleship)과 연결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뜻,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은(17-19절) 바로 참 생명의 주인이시요 인간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따르는 상호 협력적인 위치에 서는 것이다.
일제(日帝) 식민지 당시 한국 기독교의 한 단면(斷面)을 서술(敍述)한 것이 심훈(沈熏, 1904-1937)의 소설 <상록수(常綠樹,1935)>이다. 1919년의 기미(己未)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하여 약간 누그러졌던 일제(日帝)의 한국 통치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욱 호된 무단(武斷) 통치로 나아갔다.
이런 상황 가운데 조국을 지키자는 간접적인 광복(光復)운동이 학생들에 의한 농촌 啓蒙(계몽)이었다. 이 소설은 XX신문사 주최 학생계몽운동 친목회 장면에서 시작된다.
박동혁과 채영신은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農村啓蒙運動(농촌계몽운동)에 참여했다가 OO일보사에서 주최한 보고회 겸 위로회 석상에서 만나 동지가 된다. 동혁은 수원 고등 농림 학생이고 영신은 여자 신학교 학생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동혁은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인 한곡리로 내려가서 농촌 계몽운동을 벌인다. 그는 갖가지 사업을 벌이고 20평짜리 농우회 회관까지 장만하다. 지주의 아들인 강기천은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긴다. 그는 당국의 힘을 빌려 농우회관을 농촌진흥회 회관으로 돌리기 위해 수작을 벌인다. 동혁은 강기천의 수작을 눈치채고 그의 요청을 한 마디로 거절한다.
기독교 청년회 농촌사업부의 특파원 자격으로 청석골로 내려간 채영신은 부녀회를 조직하는 한편 어린이를 위한 강습소를 마을 예배당을 빌려 운영한다. 영신은 여기저기 부탁을 해서 기부금을 얻어 새 건물을 지을 계획을 세운다.
그러던 어느 날 주재소에 출두한 영신은 강습소로 쓰고 있는 집이 좁고 낡았으니 학생을 80명만 받고 기부금은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말라는 주의를 소장으로부터 받는다. 무거운 마음으로 청석골에 돌아온 영신은 학생들을 내쫓는다.
쫓겨난 아이들은 머리만 내밀고 담에 매달려 있기도 하고 뽕나무에 올라가 있기도 하며 키가 작은 계집애 들은 울고 있다. 영신은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누구든지 학교로 와서 배우라고 한다. 그녀는 재력이 있는 한낭청의 집으로 찾아가서 약속한 기부금 50원을 내줄 것을 간청한다. 영신은 기부금 강요 혐의로 주재소 신세를 진다. 출소한 영신은 과로로 쓰러진다.
청석골로 달려간 동혁은 맹장염에 걸린 영신을 입원시킨다. 동혁이 영신에게 문병을 와 있는 동안 강기천은 농우회원들을 매수하여 명칭을 진흥회로 바꾸고 회장이 된다. 이에 분노한 동혁의 동생이 회관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자 동혁이 대신 수감된다.
영신은 형무소로 동혁을 면회하러 간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농촌 운동을 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굳게 약속한다. 기독교계의 추천으로 도일해서 공부하고 돌아온 영신은 병이 악화되어 숨진다. 그녀를 장사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상록수들을 바라보며 동혁은 농민을 위해 살 것을 다짐한다.
우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율법의 형식적인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 즉 자아(自我)의 전적인 포기를 隨伴(수반)한 복음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해 진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은총을 통한 승리’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김희보 목사는
예장 통합총회 용천노회 은퇴 목사로, 중앙대 국문과와 장신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D.Min.)와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월간 「기독교사상」 편집주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서울장신대 명예학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문학과 기독교(현대사상사)」,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3권)」, 「지(知)의 세계사(리좀사)」, 「세계사 다이제스트100」 등이 있다.
#김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