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명상(23)] 구토(嘔吐)-사르트르

오피니언·칼럼
기고
인간실존과 그 미래
김희보 목사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15)

‘산 자들’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역시 동참한 자이다. 그의 부활에 동참한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자이기에 ‘산 자’이다(요 5:24).

성도는 마땅히 아담 이후 창조자를 거역하고 자기가 스스로의 주인 행세하던 삶에 대해선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써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실존(實存)은 “현실(現實) 존재(存在)”라는 뜻이다. 프랑스의 작가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80)는 소설 <구토(嘔吐)>(LaNausee, 1938)에서 인간의 實存(실존) 문제를 무신론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역사 연구에 지쳐 있는 로캉탱은 연구하는 일이 점점 지겨워졌다. 자기 개인의 과거조차 정착(定着)시키지 못하면서,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남의 과거를 들추어 규정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로캉탱은 매일 구토를 느끼면서, 자기의 생활과 절망적인 사고(思考)를 일기에 적었다.

구토의 발작이 엄습(掩襲)해 오는 순간 로캉탱은 외계의 온갖 사물과 인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실존(實存)이 로캉탱에게는 공허하게만 보였고 또한 무익(無益)한 것으로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로캉탱은 항구의 공원에서 마로니에나무 밑둥을 멍하니 쳐다보며, “존재한다” 하는 것의 부조리(不條理)를 발견하였다.

즉, 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무익(無益)한 것이며 부조리한 것임을 직감(直感)하게 되었다. 요컨대 자기가 거기에 던져졌다고 하는 것 외에 아무런 설명도 모두 거부하는 것이 ‘나’의 존재였던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오직 단순히 거기에 있는 것이다. 존재라는 것은 기억을 거치지 않는 것, 가는 곳마다 무한히 있으며 아무 쓸모도 없는 것, 그것은 혐오(嫌惡)할 만한 것이 아닌가. 나는이 부조리한 존재에 대한 분노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로캉탱은 자기의 생명이 붙어 있는 한에는, 어쩔 수 없는 손으로부터 자기 자신이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로캉탱은 이 숨막히는 듯한 실존에 에워싸인 도시에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비록 부조리한 실존이기는 하지만 글을 쓴다는 행위를 통하여 실존과 대결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 순간 구역질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근대문학이 창조해낸 수많은 무익한 존재와 고독한 존재에 로캉탱이라는 또 한 존재가 첨가되었다. 무(無)로써 무(無), 무(無)의 무(無)의 무(無)에 또한 무(無), 로캉탱의 응시(凝視)는 철저하기 때문에 남도 자기 자신도 파괴되고 말았다. 거기에는 신앙이 파고 들어갈 개미 구멍만한 틈도 없는 것이다. 인간을 부정적인 면에서만 보는 것이 옳을까?

“인간은 인간의 미래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였던가 하는 관점에서 생각하여질 대상이 아니라,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는 존재라는 것, 곧 미래를 향해 자기의 존재 전부를 던지는 자유가 인간으로 인간답게 한다는 것이다.

김희보 목사는

예장 통합총회 용천노회 은퇴 목사로, 중앙대 국문과와 장신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D.Min.)와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월간 「기독교사상」 편집주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서울장신대 명예학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문학과 기독교(현대사상사)」,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3권)」, 「지(知)의 세계사(리좀사)」, 「세계사 다이제스트100」 등이 있다.

#김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