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4) 빛이 어둠에 비치되

오피니언·칼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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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4-8
이희우 목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취임 때 “지금은 암흑기, 하지만 빛은 있다”(Now it's dark, but there's light)고 했다. 그리고 취임식에 깜짝 스타로 22세 계관시인 아만다 고먼(Gorman)을 등장시켰다. 아만다 고먼은 ‘우리가 오르는 언덕’(The Hill We Climb)이라는 시에서 “우리에게 빛을 바라볼 용기가 있다면 빛은 언제나 거기 있을 것”이라고 낭송했다. 흔히 대통령들이 취임할 때 ‘통합’을 강조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특별히 ‘빛’을 언급했다.

그런데 예수님을 ‘생명’과 연결시켰던 요한은 예수님을 ‘빛’과 연결시키기도 했다. 이 빛은 창세기 1장 3절의 그 빛이다. 하나님께서 공허하고 혼돈된 공간에 제일 먼저 창조하셨던 것이 빛이었다. 그래서 ‘빛’(φῶς)은 ‘생명’(ζωή)과 더불어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핵심 단어(key word), 요한이 굉장히 좋아하는 단어다. 23번 나오는데 이 숫자는 신약 전체에 나오는 수의 1/3에 해당한다. 요한1서에서도 6번이나 썼다. 빛이 어둠에 비쳤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빛으로 오신 예수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다. 그 이유는 빛이 생명의 본질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어두움이 생명을 꼼짝하지 못하게 해서 세상은 온통 불안의 상태, 사람들이 죄다 불행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제불능인데 요한은 구원과 관계된 말로 ‘빛’이란 단어를 썼다. 빛은 생명을 주는 것,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 이는 마치 손전등이나 스포트라이트 같이 각 사람을 비추는 빛으로 오셨다는 것, 각 사람을 고유하게 지으신 하나님께서 한사람 한사람의 인생에 독특한 방법으로 찾아오셔서 온통 어두움인 삶에 빛으로 개입하고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말씀이다.

빛으로 오신 또 다른 이유는 빛이 만물의 실체를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대로 어두울 때는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구분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삶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진리의 빛으로 오셨다. 그 빛은 베드로의 모습이 다 드러나게 한다. 죄가 선명하게 드러난 베드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때 보인 반응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였다.

그날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수고했지만 얻은 것이 없었다. 갈릴리 어부계의 큰 자, 고기잡이의 베테랑이었지만 그날 밤은 모든 경험과 지혜와 기술을 총동원해도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런데 고기잡이에는 문외한인 목수 출신 예수님이 그물을 깊은 곳에 던지라고 해서 자존심이 좀 상하기는 했지만 자존심 구기고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잡혔다. 그것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 동료들의 배까지 두 배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베드로는 빛 앞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했던 고백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아무리 세상을 알고 인생을 이해한다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임을 솔직히 시인하고, “예수님은 저와 다르십니다”라고 고백을 한 것이다. 국어를 배웠으면 주제를 알고, 산수를 배웠으면 분수를 알아야 하는데 속된 말로 주제 파악한 것, 밤샘 수고에도 얻은 것이 없는 처지지만 “고기잡이 한 번 한 적 없는 당신 말을 들을 수는 없지” 그랬다면 헛탕으로 끝, 죽 쓰고 말 상황이었다.

그런데 순진한 베드로는 순종한다. 그리고 기적을 맛보고 지금까지 자기 힘으로 살아온 것을 회개한다. 쉬운 일일까? 아니다. 자기의 한계와 죄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시인하는 것은 어쩌면 가장 힘든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용기있게 결단해서 진리의 빛 앞에 선다. 그리고 비로소 지금까지 내가 주인되어 살아온 삶을 후회하며 회개한다.

혹시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세상의 경쟁적‧상대적 가치관으로 바람에 나는 겨처럼 바람 부는 대로 밀려다니며 혼란스럽지 않나? 바이든 미 대통령의 표현대로 지금은 암흑기다. 하지만 “빛은 있다”고 했는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삶의 기준을 잡아주고 질서가 잡히고 정돈되게 하신다. 그리고 방황하던 인생을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고 살게 하신다. 그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 이제는 공허하거나 허무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빛이 활동하게 하고, 안심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듯 예수님이 빛으로 오심으로 살길이 열렸다. 생명의 빛이 되고, 진리의 빛이 되어 살맛나게 하신다.

예수님은 스스로도 자신을 빛이라 하셨다(8:12, 9:5). 빛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빛 그 자체라는 말씀이다. 천지창조 때도 만물을 이 빛으로 만드셨으니 빛은 만물의 본질이다. 빛의 근원성은 그 절대 속도에서도 드러난다. 빛의 속도는 초속 30만 km, 1초에 지구를 7바퀴 돌 수 있는 엄청난 속도다. 우주 만물의 근원인 빛이 생명의 출현을 위해 달려온 것,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 곁으로 달려오셨다.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문제는 세상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5절). 그런데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이는 헬라어로 ‘카타람바노’’(καταλαμβάνω), ‘이기다, 잡다, 누르다’라는 뜻이다. 표준새번역에서는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고 했다. 개역개정판의 ‘깨닫지 못했다’는 번역이 좀 밋밋하다면 표준새번역의 ‘이기지 못했다’는 표현은 마치 그 안에 대적 세력이 있고, 투쟁이 있는 것 같은 표현이다. 깨닫는 과정이 투쟁, 어둠이 버티고 있어서 그놈을 쫓아내야 한다는 뉘앙스라는 말이다.

플라톤은 이런 인간의 형편을 동굴 비유로 설명했다. 사람들이 동굴에 갇혀 벽만 바라보는데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 그림자를 실상으로 착각하며 산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어느 날 속박에서 풀려 입구 쪽에 갔다가 빛이 환하게 비춰 동굴 밖으로 나가니 완전 딴 세상, 빛이 너무 부셔 볼 수조차 없다. 진짜 세계를 본 것, 이게 깨달음이다. 이 사람이 동굴로 돌아와 벽의 그림자에 묶인 인간들을 계몽하는데 이게 바로 예수님이 하셨던 일이고 선교다. 그런데 “그림자일 뿐이고 실상이 아니다. 진짜 세계가 밖에 있다”고 열심히 말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고, 오히려 미쳤다며 죽이려 한다. 이것이 철학자들이 당했던 운명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이유다. 문제는 지금도 사람들이 그림자가 진실인 줄 알고 그림자만 좇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어둠속을 헤매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맹인과 같다. 요한복음 9장의 날 때부터 맹인 되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뜬다. 마치 우리가 구원을 받듯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도 맹인임을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실상은 맹인이라 하신다(9:39). 영적 맹인, 무지와 탐욕과 고집이 그들의 눈을 어둡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는 “빛이 있으라”로부터 시작된다. 헨델의 ‘메시아’, 멘델스존의 ‘엘리야’와 함께 세계 3대 오라토리오로 인정 받는 하이든의 ‘천지창조’를 보면 첫 분위기는 음울하다. 혼돈의 세계를 그렸기에 C단조의 라르고(Largo, 느리게)로 그 암울함을 묘사한다. 그런데 단조로 흘러가던 분위기가 일시에 C장조로 바뀐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는 선언과 함께 “빛이 있었고”에서 “빛”이라는 단어가 울릴 때, 음은 갑자기 포르티시모(fortissimo, 매우 세게)로 바뀌며 모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꽝”하며 깜짝 놀랄 정도의 큰 소리를 만들어낸다. 마치 온 우주 공간에 일시에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빛이 비취자 어둠이 달아났다. 혼돈의 물을 궁창 위와 아래로, 바다와 육지로 구분할 때의 모습을 표현한 말씀을 보면 “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며 주의 우렛소리로 말미암아 빨리 가며”(시104:7), 혼돈의 물이, 어둠이 줄행랑친다. 이게 빛의 힘이다. 빛은 어둠을 몰아낸다. 어둠은 더 이상 주인이 아니다.

혹시 아직도 살아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죽은 예수를 붙잡고 있나? 바리새인들은 낡은 교리로 예수를 묶어버렸다. 인습이나 전통으로 덮어씌운 예수, 편견이나 고집이 너무 강해 자기 안에 자기가 만든 우상적인 예수로 바꾼 것, 의미 없다. 빛이 없는 곳은 어둠이다. 빛이 비쳐도 계속 감추고 있다면 무슨 소용 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무감각하게 지나쳐 버린다. 갈등한다. 자기 모습을 보기 싫어하기 때문에 거짓말로 매도하기까지 한다. 아직 시간이 많다고 자신을 위로하지만 안 된다. 빛 앞으로 나와야 한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것도 날마다 만나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안에 있는 빛이 비친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12:36).

너희도 세상의 빛이다

사도 요한은 복음이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다가 갑자기 침(세)례 요한을 언급한다(6-8절). 이상할 정도, 당황스러울 정도다. 이 부분은 괄호로 묶고 읽어야 연결이 매끄럽다. 그런데 굳이 사도 요한이 침(세)례 요한을 여기서 언급한 이유는 추종자들이 많았기 때문인 듯하다. 요한은 침(세)례 요한을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을 믿게 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라 했다.

물론 당시 침(세)례 요한은 빛과 같은 존재였다. 위대한 인물이었다. 예수님조차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이”(마11:11)라고 인정하실 정도였다. 심지어 멀리 에베소에서 요한의 이름으로 침(세)례를 집행하는 제자도 있었다(행19:3). 침(세)례 요한의 회개운동이 그만큼 확산되었다는 뜻이다, 세계 곳곳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요단강으로 몰려들 정도였다.

그러나 요한은 빛이 아니다. 그저 빛이신 예수님을 증거했던 증언자일 뿐인데, 사람들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한 요한을 메시야로 생각했다. 이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에 주목하는 형국이다.

침(세)례 요한은 자신이 빛이 아님을 스스로 인정한다. 그래서 위대하다. 자기 역할은 메시야가 오실 길을 예비하는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저 손가락 역할에 만족한 것인데 추종자가 그렇게 많은 상황에서 이런 자세를 취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래된 우스갯소리지만 또 다시 나눌 필요가 있는 유머가 있다. 예수님이 천국의 보좌에 앉아 계신데 집사가 천국에 왔다. 예수님이 버선발로 달려나가 그 집사를 맞아주신다. 이번에는 장로가 왔다. 예수님이 자리에 앉아서 “왔냐?” 그러신다. 그런데 목사가 오니 긴장하며 보좌를 틀어쥐셨다.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 예수님이 “저 놈은 언제든지 내 자리를 꿰차고 앉을 놈이다.” 그러셨단다. 우스갯소리다. 중요한 것은 머슴이 주인노릇하면 안된다는 얘기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죽기 이틀 전에 이런 글은 남겼다. “신성한 아이네이스(Aeneis, 영웅)가 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깊이 무릎 꿇고 그들의 족적 앞에 경배하라. 우리는 거지다.” 왕이 아니라 거지라는 겸손함이 루터를 끝까지 예수님만 바라보게 했다. 캘빈은 자신을 추앙할까 두려워 공동묘지에 묻어 달라 했고 비석도 세우지 못하게 했다. 영광을 받아야 할 분은 그리스도요, 우리는 다만 소리요 도구일 뿐이다. 기억하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한편 마태복음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라고 하신 말씀도 잊지 말아야 한다. 침(세)례 요한이나 우리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반사하는 거울이다. 우리 안에는 빛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어야 한다. 창조의 첫날이 주는 무한한 행복감 같은, 그런 행복감이 있어야 한다. 마치 수많은 작은 태양들이 둥실둥실 떠있는 것과 같이 얼굴이 환해야 한다. 절대 지옥에서 출장 나온 사람과 같은 표정 짓지 말라. 신은 죽었다고 외쳤던 니체가 기독교인들을 향해 비꼬듯이 “신앙인들이 구세주를 믿게 하려면 좀 더 구원받은 사람답게 보여야 한다”고 했다. 맞다. 생명의 빛을 품고 있는 자답게 빛나는 표정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전도가 가능하다.

우리는 달빛과 같은 존재다. 비록 발광체는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태양 빛이 우리를 향해서 비추기만 하면 된다. 기왕이면 가장 밝은 보름달이면 좋겠다.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볼 때 만들어지는 보름달, 조금만 마주 보는 초승달, 그믐달, 반달이 아니라 보름달!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내 안에 모실 때 우리는 가장 밝은 빛을 발할 수 있다. 무지와 탐욕이라는 구름이 끼지 않아야 한다. 근심과 염려라는 비가 내리면 달은 더 이상 빛을 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밝은 데서 살면 낙천적이 된다. 흑인들의 삶을 보면 알 것이다. 그들은 걷는 것이 아니라 춤을 춘다. 빛을 많이 보기 때문이다. 반대로 밤이 많고 일조량이 부족한 북반구에 사는 사람들은 생각은 깊지만 우울증 기질이 된다. 하나님의 빛을 많이 볼수록 슬픔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춤추는 인생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되 흠뻑 부어주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사30:26). 태양보다 일곱 배 밝은 빛으로 은혜를 베풀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빛은 치료제다(말4:2). 태양의 강한 빛에 세균들이 다 멸절되듯이 하나님은 빛으로 우리의 상처들을 치유하신다. 감출 이유 없다. 하나님의 빛이 우리를 깨끗하게 할 것이다. 믿음으로 선포하라. “빛이 있으라”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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