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절대적 기준이 있는가?-상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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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류현모 교수

학교에서 개설한 세계관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향해 “너의 삶에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모든 학생이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고 대답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급변하고 있고, 개개인은 서로 다른 삶의 정황 속에 살고 있으며, 거주 국가와 지역, 가정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 답변의 논리이며 그들의 주장은 나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 학생들 중 일부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은 이 시대 교회와 기독교 가정의 문제를 드러낸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그리스, 인도, 중국 등 모든 고대 문명에서 사람들은 진, 선, 미가 무엇인지를 찾아왔으며 이것이 고전철학의 핵심 주제였다. 이런 진, 선, 미의 기준 하에 정의가 무엇인지, 삶에서 다가오는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며, 어떻게 행복한 삶을 추구할 것인지에 대해 모든 사람들은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각자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시기와 장소에 따라 수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많은 신을 가정하는 다신론 종교나, 모든 만물에 신적인 요소가 있다고 믿는 힌두교, 불교, 도교 등의 범신론에는 절대적인 신이 없다. 다신교에는 각 신마다 독특한 영역이 있어서 그 영역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범신교에서는 나도 신이고 너도 신이다. 그래서 나도 옳고 너도 옳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민간신앙은 불교와 도교와 무속신앙이 기반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전통문화를 통해 상대주의를 체득해 왔을 수 있다.

또한 절대적인 기준을 부정하는 시각은 무신론인 인본주의나 공산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유래한다. 그들은 절대적인 신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로부터 유래한 절대적인 기준도 당연히 없다고 주장한다. “반드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혹은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에서 ‘반드시’라는 절대적인 기준은 절대자를 가정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다. 무신론자들은 자신을 신의 자리에 올리고 자기의 편의와 이익에 따라 기준을 바꾸게 된다.

우리 자녀들은 공교육에서 무신론 인본주의의 국민교육을 받고 있다. 12년의 교육과정 동안 시험까지 봐가면서 이런 무신론의 이념들에 세뇌당하고 있다. 또한 대학교육은 진보라는 미명 하에 마르크스의 사상과 그 아류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점령당해 있다.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이야.” “네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야.” “네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리야.”라고 부르짖는 교수들로 대학 캠퍼스는 가득 차 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절대 진리라는 것은 웃기는 소리일 뿐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인본주의자 모리스 스토러는 그의 저서 <인본주의자의 윤리>에서 “선악의 기준이 개인의 이익인가, 다수의 이익인가? 선악은 마음의 표현인가 머리의 표현인가? 도덕성의 기준은 의도인가 결과인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라는 질문들을 던지며 혼란스러워 한다. 이는 절대적 기준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혼란이며, 가야할 방향을 잃은 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자연과 인간의 마음에 심어두신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신다. 이런 계시는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셨기에 일반계시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셨기에 이를 특별계시라고 한다. 특별계시 중에 가장 특별한 계시는 인간의 모습을 입고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말씀과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준일 것이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책은 찰스 쉘돈 목사가 실직한 인쇄공으로 가장하고 자신이 목회하는 도시를 배회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에게 받았던 냉대와 무관심의 충격적 경험을 자기 교회의 성도들에게 읽히려고 쓰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지만 그 답변이 우리 시대의 삶의 정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수께서 제시하는 그 기준을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데이비드 플랫은 그의 저서 <래디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을 따르는 것은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어려운 선택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다른 복음이 없는 것처럼 다른 기준도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치 않는 절대적인 기준이다. 이 절대적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는 첫 걸음이며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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