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이 본 성혁명사(81)] 헤르만 헤세의 경우

오피니언·칼럼
칼럼
민성길(연세의대 명예교수)
민성길 명예교수

필자는 오랫동안 헤르만 헤세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모은바 있다. 처음에는 그의 문학에 대한 매력과 그가 경건주의 목사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는데, 연구하는 도중에 헤세가 우울증을 앓았고 융 정신분석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의 문학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필자의 연구 결과는 논문으로 그리고 2019년 ⌜헤르만 헤세의 진실. 우울증, 경건주의, 그리고 정신분석⌟(인간사랑)이라는 저술로 출판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는 일차 성혁명과 이차 성혁명 사이의 전형적인 엘리트의 길을 걸었다고 생각한다.

헤세는 1877년 태어나 히피운동이 한창이던 1962년에 죽었다. 그는 유명한 인도선교사들을 배출한, 독일 슈바비아 지방의 전통적 경건주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경건주의적 가정분위기는 어린 헤세에게 죄의식을 강화한 듯 하다. 14세때 헤세는 마울브론 신학교(경건주의 기숙학교)에 입학하였다. 머리가 좋은 시인 기질의 청소년 헤세는 학교의 분위기를 억압으로 느꼈는지, 1년만에 충동적으로 기숙학교에서 도망친 사건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헤세를 정신요양원에 입원시켰다. 청소년 헤세의 아버지와 경건주의 기독교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달했다.

그는 19세 때 집을 떠나 서점에서 일하며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20세에 낭만적 시인으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였다. 소설가로서 그는 삶의 진정성, 자기 앎, 그리고 영성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평판을 듣는다. 그는 194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청년기 소설들은, 반더보겔운동(앞 칼럼에서 설명)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는 바, ⌜페터 카멘진트⌟(1904)와 ⌜크눌프⌟(1915)로 대표되는 초기 소설들은 모두 고뇌에 찬 청년이 세상과 자연을 방랑한다는 내용이다. ⌜수레바퀴 아래서⌟(1906년)는 헤세 자신의 청소년기의 고통을 그리고 있다.

헤세는 중년기에 당시 독일제국과 황제와 그가 일으킨 제일차 세계대전에 대해 반대하였다. 그는 추운 아버지의 집, 고향 독일제국을 떠나 “따뜻한 남쪽”의 중립국인 스위스의 국적을 얻었다, 1916년 헤세 나이 39세 때, 아버지의 죽음에 따라 그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 융 정신분석치료를 받았다. 정신분석적으로 그의 우울증은 아버지의 죽음에 즈음하여 그에 대한 양가감정과 반항에 대한 죄의식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후 그는 융의 영향으로 무의식의 세계 내지 영지주의적 영적 세계를 “구도적으로 방랑”하는 소설들을 썼다. ⌜데미안⌟(1919), ⌜싯다르타⌟(1922), 그리고 ⌜황야의 이리⌟(1927)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미 히피들에 앞서 1920년대에 인도를 여행하였었다.)

말년의 소설들, 즉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 ⌜동방여행⌟(1932), ⌜유리알 유희⌟(1943) 등도 역시 지고한 정신적 수준에 도달하기 위한 청년의 일생에 걸친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의 최후의 소설, 노벨상 수상작인 ⌜유리알 유희⌟는 서기 240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미래 소설이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거의 모든 소설들이 주인공들의 죽음으로 끝맺는다. (특히 강 또는 호수에서의 죽음) 특히 그의 최후의 노벨상 수상작인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은 제자 소년의 부름에 응하기 위해 호수에 들어갔다가 그냥 허무하게 익사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러한 결말에 대해 수많은 해설들이 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았다.

그의 중년기 이후 소설들의 주제는, 방랑(진리와 구원을 추구한 여정), 프리섹스, 무의식적 환상 등등이다, 즉 시대적으로 앞서가는 “히피적” 사상을 볼 수 있다. 그래서 20여년 후 60년대 미국의 히피들은 헤세를 자신들의 선지자 구루 증 한사람으로 보았다. 특히 ⌜싯다르타⌟와 ⌜황야의 이리⌟(특히 “마술극장” 장면에서)에서 주인공은 마약을 복용하여, 그 효과가 싸이키델릭하게 나타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물론 헤세는 오해라고 변명하였다. 60년대에 티모시 리어리와 콜린 윌슨 등 평론가들은 헤세를 반문화(counter-culture)의 이상형이라 칭송하였다. 노인 헤세는 새삼 유명해지고 그의 소설은 각국어로 번역되면서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주류사회는 헤세를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존재로 비판하였다. 실제 헤세는 1930년대에 유럽의 (무정부주의적이고 지금 보면 히피적이던) 지식인들의 모임인 몬테 베리타의 “대안적 지식인들의 공동체”에 열심히 참여하였었다. 헤세는 당대의 많은 엘리트들처럼 막시즘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히피운동이 잠잠해 지면서 헤세도 잊혀져 갔다.

비록 헤세 자신은 자신이 독일 기독교 경건주의의 자식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실제 헤세 문학에는 동방사상들-힌두교, 불교, 도교, 유교 등-의 요소들과 심지어 신지학(theosophy. 현재의 뉴에이지와 비슷한)의 영향이 뚜렷하다. 헤세 자신은 야콥 부크하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나, 그의 종교적 사상은 영지주의적이고 혼합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 미국과 유럽 특히 독일에서의 헤세에 대한 비판은 양가적이다. 그의 독일어 문장이 아름답다는 것은 모두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은 60년대 청년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용도 이외에는 별로 읽히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문학은 순수해 보이지만, 청소년기적이며, 비현실적이며, “키치”(Kitsch)하다는 것이다. 헤세 사상은 현대 부르주아 문화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또한 냉소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특이하게 그의 소설 주인공들은 전원 남자이다. (그래서 그가 homosocial이라는 비판이 있다) 반면 여성 등장인물들은 전형적으로 젊은 주인공을 돕는 모성을 보이는 창녀들이다. 그래서 헤세는 여성혐오주의자라는 비판도 있다.

헤세는 가정적으로 불행하였다. 실제 3번 결혼하고 2번 이혼하였는데, 첫 번째 부인은 9세 연상이었는데, 중년기에 정신병에 걸려 이혼 당하였다. 두번째 및 세번째 부인은 모두 20세 연하였다. 부인은 이런 사실들은 헤세의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해 암시하는 바 크다. 첫 부인이 낳은 아들 증 하나는 중년기에 이르러 우울증으로 자살하였다.

헤세 같은 20세기 전환기의 뛰어난 “선구적” 지식인들이 대개 이러할진대, 우리 크리스천들은 현대사회의 반문화(counter-culture)에 대해 잘 분별하여야 한다. 특히 프리섹스 성혁명, 히피문화, 마약문화, (다음 칼럼에서 언급할) 급진 페미니즘, 그리고 현대 LGBT 이데올로기 등등이. 성-사랑-가족 문제에, 특히 청소년과 여성에게 어떤 궁극적 영향을 주게 되는지 심사숙고해야 한다.

지금 한국에서는 여전히 헤세나 “데미안”에 대한 인기가 높다. 외국 평론가들은 BTS나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 가사에 데미안-청소년기적 가치관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데미안은 영지주의의 신 아브락사스의 화신임을 알아야 한다. 청소년-청년기에 인생에 대해 “고뇌”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자라 어른이 되어야 한다. (참고로 현대의학에서는 청소년기를 24세까지로 보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

성경(고전 13:11)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라고 교훈하신다.

#민성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