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이 보는 성혁명사(72)] 실존주의, 사르트르 그리고 다자연애

오피니언·칼럼
민성길(연세의대 명예교수)
민성길 명예교수

실존주의는 19세기에 등장하여 이차대전 후 서구 세계를 풍미한 철학 사조였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기독교를 비판하며 하나님을 떠나고 있었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성혁명과 관련하여 실존주의와 인간 섹슈얼리티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파리 68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친 사상 중에 네오막시즘과 더불어 실존주의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혁명 중 파리 시내 벽에 낙서들에는 실존주의 정신이 넘쳐났다. 당시 사르트르는, 파리의 68학생들은 모든 것을 원했지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고 하며, 그것은 바로 자유를 원한다는 의미라 하였다. 당시 쟝 폴 사르트르와 그의 섹스파트너 시몬 드 보봐르는 자유와 자기결정권 그리고 책임이라는 실존주의 정신으로, 이미 성혁명적 다자연애(polyamori)를 실현하고 있었다.

일차성혁명이 1920년대 있었는데, 사르트르와 드 보봐르는 1929년에 만났다. 미인이었던 드 보봐르는 자기보다 더 똑똑하지만, 키가 작고 사시가 있는 사르트르의 구혼을 거절하였는데, 그녀에게 레스비언 애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사르트르가 제안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성관계를 계약하였다. 결혼하되 각자의 섹스는 ”자기결정권“으로 ”자유“롭게 즐기되, 서로에게 ”성실“하기를 약속하는 계약적 오픈 결혼이었다. 당시로서도 이는 파격적인 성혁명적 실험이었다. 이는 전통 성문화를 거부하는 것일 뿐 아니라, 철저한 무신론적 인본주의를 따르는 것이다. 사랑과 삶을 공유하지만 통상적 제한을 갖지 않는, 자유로운 다자연애(polyamori)를 양해하기로 합의한 파트너쉽, 이런 파트너쉽은 1929에서 1980년 사르트르가 죽을 때 까지 50여년간 지속하였다. 혹자는 이 50여년간의 ”사랑의 관계“을 용감하다고 칭송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사르트르의 끊임없는 불륜과 드 보봐르의 숱한 양성애 행위로, 그야말로 광기어린 다자연애의 지저분한 양상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차대전 직후 그들의 명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특히 드 보봐르는 남녀 평등의 현대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되었다. 당연히 그들은 동성애도 자유와 자기결정권의 이름으로 옹호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행복하였을까? 사르트르는 끊임없이 그가 선택한 어린 여성과 성관계를 하여, 연쇄유혹자(serial seducer)라 불리운다. 드 보봐르는 드 보봐르대로 예쁜 어린 여자 제자들과 레스비언의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 각자의 성생활에 대해 정직하고 자세하게 서로 알렸다. 그 둘은 다자연애를 경쟁하듯 하였다. 그러면서 드 보봐르는 자신의 어린 연인들을 사르트르의 침실로 보내 주기도 하였다. 드 보봐르의 연인이었던 Bianca Lamblin은 나중 그들의 삼각관계를 폭로하는 책을 썼다. 한때 사르트르가 암페타민 중독에 빠졌을 때, 드 보봐르는 자신의 연인을 사르트르에게 보내 간호하게 해 주었다. 사르트르가 이차 대전 때 전장으로 나갔을 때 파리에 남은 드 보봐르는 남자 여자 모두 유혹하였다. 그리고는 전선에 있던 사르트르에게 정직하게 자극적인 글로 알렸다. 그들은 이 게임을 사르트르가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항상 드 보봐르를 한 발 앞서 갔다. 사르트르는 자기 마음대로의 행동과 의기양양함이 심해져 갔고, 드 보봐르는 사르트르의 끊임 없는 여성 정복과 불륜에 강박적인 질투의 화신이 되어 갔다. 심지어 사르트르는 드 보봐르의 어린 여동생도 유혹하였다. 분노한 드 보봐르가 어린 여성과의 관계로 복수하면, 사르트르는 또 다른 불륜으로 보복하였다. 어린 여학생들의 정신은 황폐하여 갔으며 일부는 자해하거나 자살하였다. 그 스캔들로 드 보봐르는 교수직을 잃기도 하였다.

전후 1945년 사르트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영웅시되었다. 뉴욕에서 그는 한 라디오 여기자와 관계를 맺었다. 유럽에 남아 있던 드 보봐르는 다른 기혼 남자들과 차례로 관계하면서 그에게 자세히 알림으로 보복하였다. 드 보봐르가 1947년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녀도 시카고의 작가 Nelson Algren과 관계를 맺었다. 39세였던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오르가즘을 느꼈고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Algren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지만 사르트르를 떠나려 하지는 않았다. 이 불륜은 사르트르를 자극하여 자기 곁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희망의 표현이었다. (이 삼각관계는 나중 연극으로 나왔다) 미국을 떠날 때 Algren은 그녀에게 은반지를 선물하였는데, 그녀는 이를 남은 평생 끼고 살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녀는 그 유명한 페미니즘의 고전인 ˹제2의 성˼(The Second Sex)를 썼다.

사르트르와 드 보봐르는 각자 새로운 연인을 가졌지만, 둘이 같이 전 세계를 여행하였다. 원래 막시스트였던 그들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와 모택동을 만나며 더욱 공산주의에 집착하였다. 마침내 사르트르는 드 보봐르가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1965년 사르트르는 자신의 정부였던 25세의 알제리인 여성을 양녀로 입양하였다. (당연히 나중에 유산 문제가 불거졌다) 사르트르는 암페타민, 불랙커피, 시가, 그리고 이후에는 수면제와 포도주를 남용한 결과 나이 들어 더 절제가 없어졌다. 1980년 사르트르가 죽자 드 보봐르는 병원 시트 아래에서 죽은 사르트르와 같이 마지막 밤을 지냄으로 ”성실“의 약속을 지켰다. 우리가 아는 ”멋진“ 실존주의 철학에 이런 섬뜩한 이야기를 감추어져 있다니, 놀랍다.

그렇게 외도하고, 서로 갈등하면서도 왜 그들은 헤어지지 않았을까? 결혼에 매이지 않은 자유스런 성은 그들이 표방하는 자유와 자기결정권의 철학에 맞았고, (그러나 무책임하였다.) 또 그들 ”천재 지식인들“의 실험적 결혼은 헤어지기에 이미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그런데다 각자 너무 유명하여 섹스파트너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그 두 사람은, 사상과 문화가 어떠하든, 각자의 생물학적 소인에서 해방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르트르는 자기멋대로 행동하는 타고나는 생물학적 남성성에서, 그리고 드 보봐르는 어쨌든 감수하는 생물학적 여성성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도 결국 하나님의 피조물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민성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