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이 본 성혁명사(63)] 라벤더 공포 그리고 후커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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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길 명예교수

2차 대전 후, 미소간에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 FBI는 소련의 공산주의자들과 소련의 스파이들과 그 동조자들이 미국(특히 정부, 대학, 영화계 등)에 침투하여 국가를 전복시키려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947년부터 FBI의 주도로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안전에 대한 위협을 이유로 공무원 직에서 면직되거나 군대에서 불명예 제대하였다. 이를 제일차 “Red Scare”(빨갱이 공포)라 한다.

1950년 한국의 6.25사변 발발로 이런 공포는 더 심해졌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Joseph R. McCarthy 1908–1957)가 정부, 군대, 그리고 사회 각층에 침투해 있는 공산주의자, 소련 스파이, 그리고 그 동조자들을 색출하여 축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공화당 주도의 여러 위원회를 조직하여 FBI와 더불어, 고위직 공무원, 연예인, 학자, 정치인, 노동운동가 등등 사회유력인사들에 대해, 불충성, 국가전복, 반역 등을 조사하고 직장에서 쫒아 내거나 투옥하기까지 하였다. 이를 제2차 Red Scare라 한다. 특히 매카시와 FBI는 헐리우드를 미국에 부정적인 공산주의의 온상으로 보았다.

맥카시는 국가 반역자 색출 대상에 동성애자들을 포함하였다. 그 이유는 동성애자들은 동성애 행동으로 사회 안전을 해칠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은 정신에 결함이 있어 공산주의의 유혹에 넘어가 그 동조자가 되기 쉽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실제로 많은 동성애자들이 색출되고 정부기관의 직장에서 쫒겨 났다. 동성애자들은 동료 동성애자들의 이름을 밝히라는 요구도 받았다. 압박감에 어떤 동성애자들은 자살하였다. 당시 동성애에 관련된 공포를 나중에 “라벤더 공포”(Lavender Scare)라 부른다.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게이와 레스비언이 결혼하기도 했는데, 이를 “라벤더 결혼”이라 부른다.

그럴만한 것이 (지난 칼럼에서 설명하였듯이) 1940년대 이후 미국에서 성해방과 동성애 정당화를 주장한 정신분석가 빌헬름 라이히는 알려진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맥카시선풍이 한창이었던 1954년 빌헬름 라이히는 의료사기로 감옥에 갇혔다. 그는 오르가즘을 증진한다는 “orgone boxes”라는 장치를 만들어 팔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1950년에 해이(Harry Hay 1912–2002)가 게이인권을 옹호하는 조직으로 Mattachine Society를 창설하였는데, 그는 공산주의자이며 노동운동가이며 동성애자였고, 동료들도 같은 부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년에 Hay는 동성애 소아성애를 옹호하여, 악명높은 the North American Man/Boy Love Association(NAMBLA)를 열렬히 옹호하였다)

후커(Evelyn Hooker 1907–1996)는 심리학자로서 맥카시선풍이 갈아 앉을 즈음 1957년, 남자 동성애자 30명과 남자 이성애자 30명을 대상으로 심리검사를 시행하여 두 집단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논문을 발표하고, 동성애자는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주장하였다. 후커는 동성애를 정신장애로 분류하는 것은 치료 중에 있던 병적인 상태의 동성애자들만 대상으로 연구했기 때문이며, 사실에서는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동성애자가 많다는 것이었다.

즉각 비판이 나왔다. 즉 이 연구에 치명적인 결함으로 “자원자 오류”가 있었던 것이었다. 연구대상이었던 동성애자 30명 대부분은 동성애자 지원 단체인 the Mattachine Society의 뉴욕지부에서 추천하였던 것이다. 반면 이성애자 대상을 모집했던 방법은 명시되고 있지 않다. 또한 연구에 사용된 심리검사 방법은, 주제통각검사(TAT), 로르샤흐검사, 및 Make a Picture Story test 등 3가지 투사적 심리검사(projective test)였다. 이런 심리검사 방법은 내면의 불안, 공포, 또는 소원을 알아내는 검사로서,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고 있는가 하는 수준을 직접 검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마음속에 불안, 우울, 망상이 있어도, 영리하다면, 이것들이 투사되지 않도록 거짓대답을 할 수 있다. (반대로 투사되도록 거짓 대답을 할 수도 있다) 또한 검사결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함에 있어, 평가자가 대상이 동성애자인지 아닌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는 문제도 지적되었다. 즉 연구방법이 이중맹 방법(double blind method)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한 연구결과를 다시 분석해보면 동성애자 집단에 강박증이 있다는 증거들도 발견된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을 우울증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도 투사검사에서는 본인이 거짓말을 할 수 있어. 정상인과 구별하기 쉽지 않다. 그런 정상적으로 보이는 우울증 환자가 존재한다고 해서 우울증이 정신장애가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후커 자신이나 미국 심리학회가 이런 연구결함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과학보다 이데올로기편에 서 있음을 나타낸다. (현재 동성애 옹호자들은, 동성애자들이 보이는 우울증이나 불안상태는 인정하지만, 사회적 차별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지에 대해서는 차후에 토론할 예정이다.)

당시 미국사회의 이데올로기 혼란은 극심하였다. 1950년대의 맥카시선풍 이후 이에 대한 사회적 반동이 크게 일어났다. 1960년대 학생운동, 히피운동, 반전운동, 여성운동, 노동자운동, 흑인운동, 프리섹스운동(성혁명) 등 반문화운동이 그 예들이다. 당연히 게이 인권운동도 일어났다. 게이 운동가들은 후커의 논문과 킨제이 보고서를 근거로 1970년 동성애자들은 동성애를 정신장애 진단분류에서 빼라고 시위를 시작하였고, 그 3년에 걸친 압력에 결국 1973년 미국 정신의학회는 동성애를 정신장애 분류에서 제거하였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동성애 운동의 기원과 그 확장과 그 수법들을 이해하고 대응하는데 도움을 준다.

민성길(연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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