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주한 미국대사의 불편한 언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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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골드버그 신임 주한 미국대사가 지난 16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해 성 소수자 권리를 지지하는 연설을 한 것을 가지고 뒷말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가 한국에 오자마자 공식적으로 참석한 첫 행사가 하필 성 소수자 축제였다는 점도 있지만 정작 불편했던 건 그가 성 소수자들을 향해 외친 연설 내용이다.

골드버그 대사는 서울 퀴어축제 당일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서울광장에 마련한 부스를 방문한 뒤, 오후 3시 45분쯤 무대에 올라 연설을 시작했다. 자신이 막 한국에 부임한 미국대사라는 사실을 알리면서 “퀴어축제에 꼭 참석하고 싶었다”며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 이유에 대해선 “혐오를 종식하기 위한 미국의 헌신을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축제 참가자들의 환호에 고무된 듯 “평등과 인권을 위해 여러분과 함께 계속해서 싸울 것”이라는 말도 했다.

미국대사가 성 소수자 축제에 참석한 것을 뭐라 하겠는가. 오바마 정부의 마크 리퍼트, 트럼프 정부의 해리 해리스 등 이전 정부의 주한 미국대사들도 퀴어축제에 참석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여길 일도 아니다.

한국에 막 부임한 미국대사의 첫 공식 일정이 퀴어축제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이 역시 행사 일정과 부임 시기가 묘하게 겹쳤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대사가 부임하자마자 참석한 퀴어축제장에서 단상에 올라 지지연설을 한 건 예사로 볼 일은 아니다. 더구나 그의 연설에서 나온 “혐오 종식”, “평등과 인권을 위한 투쟁”과 같은 표현들이 동성애를 놓고 우리 사회를 편 가르는 선동으로 비칠 수도 있어 위험하고 충격적이다.

같은 시간 서울광장 인근에서는 수만 명이 참석한 반동성애 국민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골드버그 대사가 이런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몰라도 그의 연설에 가시가 돋쳤다. 그것이 동성애를 반대하는 국민을 향해 날린 비수였다면 이건 심각하다.

골드버그 대사는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되기 전에 미 국무부 대북제재 이행 담당 조정관을 지냈다. 이런 과거 이력으로 북한의 인권탄압 문제나 지난 정부에서 귀순 어민을 강제 북송한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면 소신 발언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그의 주한 미국대사로서의 직무와 한국 내 성소수자 인권 문제는 전혀 별개 사안이다. 업무적으로 봐도 미 국무부 내에 인권 부서가 따로 있으니 주재국 대사의 직무와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대사로 부임하자마자 이전 대사들의 관행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언행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다.

우선 그는 동성애자다. 외교관 신분으로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이력으로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후 오랫동안 공석이던 주한 미국대사에 그가 내정되었다는 소식에 국내 반동성애 단체들이 우려와 반대 의견을 표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단지 성 소수자라는 이유가 대사 자격에 결격사유가 되진 않는다. 현재 미국 내 성 소수자 문제는 미 대법원에서 동성혼이 합법화된 후 페미니즘과 인종차별 이상으로 바이든 행정부가 중시하는 다양성의 화두로 자리했다.

그러나 그의 성 정체성과 미국대사로서 한국의 성 소수자 권익에 앞장서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자신이 성 소수자라서 한국의 성 소수자들에 연대를 표시한 것이라고 정서적으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동성애 반대 진영과의 투쟁을 언급한 건 분명 대사로서의 직무 범위를 한참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골드버그 대사의 퀴어축제 언행을 놓고 반동성애 단체들은 연일 격앙된 반응이지만 교계는 공식적인 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그의 확증 편향적 언행에 심기가 불편하면서도 이를 내색하지 않는 데는 자칫 윤석열 정부 들어 복원돼 가는 한미동맹에 미세한 균열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 인권은 인류의 공통과제지 성 소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외교관 신분의 골드버그 대사 자신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 반동성애단체들도 그의 퀴어축제에서의 언행이 일회성으로 그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문제가 있다. 그가 언급한 한국의 성 소수자를 위한 ‘투쟁’의 실체다. 이것이 만에 하나 ‘차별금지법’ 등에 관한 정치적 영향력 시도로 나타난다면 앞으로 한미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악재가 될 수 있다.

지난 27일 미국 워싱턴에 있는 참전용사공원에서 6·25전쟁 정전 69주년을 기념해 ‘추모의 벽’ 제막식이 있었다. 이 추모의 벽에는 6.25때 피를 나눈 3만6,634명의 미군과 7,174명의 카투사 전몰장병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자체가 자유와 평화를 위해 피 흘린 한미동맹의 역사적 상징물이다. 이는 곧 신임 주한미국 대사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보다 한미동맹의 굳건한 틀 위에서 두 나라 관계 발전에 더 신경써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