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보다 ‘섬김’ 실천하는 인재 양성이 비전”

교회일반
인터뷰
최승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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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일장신대학교 총장 채은하 목사
한일장신대학교 채은하 총장 ©최승연 기자

전라북도 완주군에 위치한 한일장신대학교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 시절인 1922년 6월 2일 광주에서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파견한 엘리자베스 쉐핑(한국명: 서서평) 선교사에 의해 여성을 위한 전도부인 양성학교로 시작되었다. 그 다음 해인 1923년 9월 4일 전주에 설립된 여성성경학교는 1928년에 미국에 있는 하밀톤 부부의 교사 신축헌금으로 중화산동 1가 155번지에 교사를 신축하고 교명을 ‘전주한예정성경학교’로 정하여 학생 교육을 하게 되었다.

이후 1940년 9월과 10월 신사참배 거부로 광주와 전주의 성경 학교가 폐교를 당했으며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복교했다. 이후 1952년 전주한예정성경학교는 전주 고등성경학교로 인가받았으며, 1956년 ‘전주 한예정 성서신학원’으로 교명을 변경하고 전라북도 교육위원회로부터 고등학교령에 의한 각종학교로 허가받았다. 1961년 4월 전주힌예정성경학교의 ‘한’자와 광주 이일성서 신학교의 ‘일’자만을 따서 ‘전주한일신학원으로’ 합병했다.

이후 1998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제83회 총회에서 총회직영신학대학으로 허락받고 ‘한일장신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올해 100주년을 맞이한 한일장신대는 인성, 영성, 지성의 교육이념을 가지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하나님 말씀을 사회에 실천하며 시대 변화를 주도하는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한일장신대의 역사, 지방신학교의 어려움,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교육 내용 등을 채은하 총장으로부터 들을 수 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A. 한일장신대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기 위해 1997년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2020년 11월 6일부터 제7대 한일장신대 총장으로 선임되어 일하고 있다.

Q. 신학교 최초 여성 총장이신데 총장으로 선임된 배경은 무엇인지?

A.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교단에 소속되어 있는 목사다. 우리 교단에는 서울을 포함한 각 지역에 총 7개의 신학대학교가 있다. 이 중에서 한일장신대는 유일하게 여성으로 시작한 학교이다. 우리 학교는 100년 전 여성 선교사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에는 남성 학장, 교장, 총장님들이 학교를 운영해왔다. 100주년을 맞이해 학교의 본 목적인 ‘여성 교육과 여성들을 통한 복음전파’를 상기하며 여성리더십을 꿈꿔보자는 캠페인이 이사진들에게 설득이 되어서 총장으로 선임되었다.

Q. 장신대학교 명예교수인 주선애 교수님이 최근 별세하셨다.

A. 故 주선애 교수님은 나의 은사이시다. 장신대학교 기독교학과에서 공부할 당시 주선애 교수님으로부터 몇 년 동안 수업을 받았다. 여성이 교육을 받아야 하고, 교회나 가정에서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게 주 교수님의 교육관이자 신앙관이셨다. 한편 여성을 중심으로 호남 지역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한일장신대 전신인 한일여자신학교 출신의 전도사님들이다.

Q. 지방신학교들이 어렵다고 들었는데 한일장신대는 어떤가?

A. 1997년 한일장신대 구약학과 교수로 부임했을 당시 한일장신대 신학과는 100명을 모집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교회를 위한 목회자의 소명이 있는 사람이 많았으며. 신학대이지만 젊은 학생들이 많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교회의 평균 연령층이 노령화되고 사회의 지탄을 받으면서 목회자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학령인구가 감소하면서 젊은 사람들의 ‘수도권으로 진입해야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지방에 있는 신학대에 입학하려는 신학생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런 현상으로 인해 신학과에 오려는 학생들의 수를 채우기가 만만치 않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우리 학교는 신학과뿐만 아니라 사회복지학과, 심리상담학과, 실용음악학과, 간호학과, 운동처방재활학과가 있어서 학생들을 모집할 수 있지만, 신학과 모집은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신학과는 젊은 학생들만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만학도도 모집해 교육하려 하고 있다.

Q. 총장님께서 신학생들에게 강조해서 교육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A. 총장으로 선임되기 이전 24~25년 동안 신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10년 동안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강조했던 부분은 우리 학교의 슬로건인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라는 것이다. 우리 학교가 교육받지 못한 여성들, 복음을 접하지 못한 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로 시작한 만큼,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해서 좋은 자리, 높은 자리에 가며 남보다 앞서는 것을 꿈꾸는 게 아닌 내가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처럼 남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남을 도와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 학교의 존재 이유라고 본다.

교수로서, 총장으로서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목사든, 목사가 아니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청지기로서의 직업을 갖고 단순히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의미 있고 행복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Q. 서서평 선교사에 대해 설명 부탁드린다.

A. 서서평 선교사는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사생아였다. 서서평 선교사의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고 본인은 개신교인이었으므로 어머니와 관계가 좋지 못했다. 서서평 선교사의 직업은 간호사였으며 1912년 미국 남장로교에 의해 파송을 받아서 광주로 오게 되었다. 광주뿐만 아니라 제주도, 군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위생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고 ‘남녀 칠세 부동석’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에 서서평 선교사는 위생교육뿐만 아니라 교육받지 못한 여성들, 남편에 의해 쫓겨난 여성들, 과부들을 경제적으로 독립시키고 교육할 수 있는 ‘전도 부인’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세웠는데 그곳이 바로 한일장신대의 시초이다.

서서평 선교사는 단순히 교육만 한 게 아니라 12~13명의 고아를 양자, 양녀로 입양했으며 한센병 환자들을 집으로 데려와 간호하고 먹을 것을 주는 역할을 했다. 그는 1934년에 별세했지만, 단순히 복음 전파만 한 게 아니라 그 당시 소외된 약자들을 자기 사재를 팔아서 전부 다 그들을 위해 사용했다. 또한 서서평 선교사에 의해 여전도회가 결성되었고, 대한간호협회를 만들어서 세계에 한국인 간호인을 파송하기도 했다. 20세기의 예수 그리스도로 언급할 만큼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존경과 모델이 될 수 있는 여성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수고하셨던 선교사이다.

Q. 한일장신대가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했는데 앞으로의 100주년을 위한 비전이 있다면?

A. 한일장신대가 100년 동안 쉬웠던 적이 있는지 돌아보면 일제 시절에는 폐교되었고, 한국전쟁 때는 휴교가 되었고, 군사독재 시절에는 데모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잠시 한일장신대에 학생들이 많았던 적이 있었지만, 2022년을 맞이해서 정원이 얼마나 충족될지 고민하는 상황에서 우리 학교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의 학교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하나님의 학교로서 생존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이나 서구권은 신학대가 살아남기 어렵다. 20~30년 전 신학교의 학생 수가 감소하면서 신학교가 팔려서 다른 용도로 변경되고 어려워져서 서구권은 목회자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10~15년 후에는 목회자 구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지방 대학이지만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 학교의 또 다른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면 섬기는 인재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은 섬기는 것이 아닌 섬김을 받으려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며 경쟁을 해서 이기려는 시대정신을 가진 사회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있는 자리에서 남을 섬기고 도움을 주며 가치 있는 인재로 양성하는 것이 비전이다.

Q. 끝으로 더 하실 말씀이 있다면?

A. 100주년을 맞이해서 모든 동문과 지역 교회, 뜻을 같이하는 한국교회가 지역 사회의 여러 지역민과 함께 우리 학교를 통해서 건강한 관계를 지속하는 일이 더 확고해지고, 강화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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