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2)

오피니언·칼럼
기고

*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2.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최더함 박사

구속협약의 내용과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 간의 구속협약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신 구속주라는 사실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구속을 실천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혹은 ‘그리스도의 비하(卑下, humbleness)’라고 규정하고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해석합니다.

첫째,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물론 ‘성육신’이라는 단어는 성경이 없습니다. 라틴어로 ‘Incarnatio’인데 이는 ‘몸을 취하다’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화신(化神)‘이라는 신학적 용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거룩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나님께서 몸소 죄로 오염되어 부패하고 타락하고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여 이 땅에 출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소유한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그분은 비록 육신을 가진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그분을 마리아의 몸에 잉태시키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의 독특한 관계가 성립됩니다. 이 관계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일러 늘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했습니다.

4복음서 기자 중 성육신의 개념을 가장 잘 드러낸 사람은 사도 요한입니다. 예수님의 신성보다는 인성을 먼저 언급한 마태나 누가와는 대조적으로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이전부터 하늘에 계셨던 분이며 그 자체를 ‘말씀’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그는 성육신을 “말씀이 육신이 된 것”으로 풀이합니다. 이런 구절을 기초로 ‘성육신’이라는 신학적 용어가 탄생한 것입니다. 혹자는 신학 용어들이 성경에 없다는 구실을 가지고 신학 자체를 터부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주장이요 가엾은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은 금을 광산에서 캔 금만 인정하고 모래사장에서 캔 금은 금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성육신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견해와 연구들 및 또 이에 반대하는 논쟁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이중상태에 대한 논쟁’ 혹은 ‘신성과 인성 논쟁’ 또 혹은 ‘높아짐과 낮아지심’의 논쟁이라 말합니다. 우선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뿐 아니라 높아짐에 대해서 묘사합니다. 381년에 작성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는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나의 존재가 동시에 하나님이면서 사람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루터파에서는 ’자기 비움‘(kenosis)이라는 이론을 내세웁니다. 즉, 말씀의 성육신은 자기 비움으로 이해되는 대신에 그의 신적인 속성들을 자제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취하셨을 때 그는 자신의 신적 속성들을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포기했거나 그 속성들을 잠재적인 형태로 지니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유주의 신학자로 알려진 판넨베르그 같은 신학자들의 경우, 지상에서 행한 예수님의 삶을 오직 인간의 삶으로만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들에 대해 개혁파 신학은 말씀의 성육신을 신적인 영광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는 것이거나 감추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거지와 왕자>라는 희극처럼 왕자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거지 체험을 한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이 모든 논쟁을 정리했습니다.

“삼위 일체 중에 제 2위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자 성부와 동일한 본체를 가지고 아버지와 동등하시다. (중략) 전체적이고 안전하며 구별되는 두 본성들 곧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변화 없이 합성 없이 혼합됨이 없이 서로 분리될 수 없도록 결합되시었다. 그 인격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지만 한 그리스도시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시다”(8장 2항)

이러한 낮아지심을 가장 잘 표현한 성경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으로 소개한 빌립보서의 말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상태가 묘사되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비우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인간이 되기 전에 지니고 있던 모든 영광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의 낮아짐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결국 그의 낮아지심은 그를 극한에까지 이르게 해서 그를 십자가 위에 달리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자신을 가장 굴욕적인 수준으로 낮추자 하나님은 그를 가장 높은 중보자의 자리로 끌어 올리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다룰 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 이 고난이 오래전부터 예고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중 대표적인 예고가 예수님보다 700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입니다. 오늘 소개한 이사야 본문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것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 53:3~9)

여기서 저는 특별한 생각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아기의 엄마로 택함을 받은 마리아의 경우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떤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의 삶이 앞으로 수많은 고난의 골짜기를 걸어가야 한다고 정해졌다고 한다면 어느 부모가 기뻐할 리가 있습니까? 여기서 저는 개인적으로 마리아라는 한 여성의 심사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아기가 누구인지를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이미 예고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알고 그녀는 아기 예수를 지극 정성으로 키웠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아기는 성장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공생애를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기를 떠나는 아들의 등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수없이 많은 굴욕과 모멸과 조롱과 비아냥과 헛소문, 괴소문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며 신성모독의 죄로 체포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아들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았을까요? 아무리 인간적인 정을 끊어내려 해도 그 가슴은 절절히 아프고 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어이 그녀의 눈앞에 십자가 죽음의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사형을 당하는 아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서도 큰 소리로 울 수도 없었던 그녀의 심정을 헤아리면서 우리는 한 번쯤은 숙연해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가톨릭처럼 그녀가 훌륭한 여인이라 하여 개인적으로 신적인 자리에 올려놓고 숭배하거나 마치 무흠한 여인처럼 취급하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진짜 신성모독일 것입니다. 존경하고 흠모하고 그녀의 훌륭한 행실을 본받고자 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계속)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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