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바라보는 신학적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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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목사

사람은 때가 되면 죽는다는 사실은 상식이고 모두 인지하고 있다. 오늘도 널싱 홈(Nursing Home)에 들어가서 기도드렸는데 뭔가 이상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금방 돌아가시었다. 목 옆으로 맥박이 뛰질 않아 급히 간호사에게 말해 주었더니 영어로 'Expired' 되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주로 'Passed away'라는 말을 쓰는데 참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물건이 날짜가 지나면 'Expired'라는 용어를 쓰지만 돌아가신 분에게 미국 간호사들은 가끔 사용하는 용어이다. 'Expired'라 하니 용도 폐기처럼 느껴져 여기서도 문화적 차이를 느껴본다.

지난 학기는 과목의 특성상 채플린의 사역(Chaplaincy)에 관해서 나누었다. 그리곤 죽음의 과정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게 되었다. 글쎄, 아직은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모두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종종 장의사(Funeral Home)에서 전화가 온다. 장례 예배를 봐 달라는 전화이다. 누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한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가보면 대부분이 갑자기 돌아가신 분들이다. 어떻게 심장이 멎었는지 궁금하지만, 유족의 평안을 위해서 묻지 않는다. 그저 예배드리고 화장장까지 가면서 기도와 위로로 헤어진다.

이렇듯, 목사로 불림 받은 사람은 죽음과 떨어져 있을 수 없다. 늘 장례가 있게 마련이고 위로와 임종 예배로 마지막 가는 길을 돌보아야 하는 직임은 부르심의 일부 이다. 역시 채플린의 직임은 24시간 전화를 받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아직은 한국 사람들에겐 채플린이라는 언어가 생소하지만, 때에 따라서 한밤중에 걸려오는 전화가 있다. 밤 1시나 2시 즈음에 돌아가시든지 아니면 임종을 보아 달라는 부탁이다. 이럴 때 비상이다. 급히 옷을 갈아입고 혼자 가는 길은 착잡해진다. 가서 환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며 가족을 위로하고 예배드리고 돌아오는 길도 깊은 상념으로 푹 빠진 어둡고 긴 길이다.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곰곰이 생각도 들고 뵈었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길이다.

목사도 그렇고 채플린이란 직임은 죽어가는 분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젊을수록 목사를 안 만나려고 하지만 완강히 거절하는 경우는 설득하든지 피해 주지만 대부분은 만난다. 그리곤 나이와 관계없이 가는 길이 같다. 이들에겐 신앙에 따라서 채플린을 볼 때 저승사자나 천사로 보는 경우로 다양하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발견했다. 건강한 사람에겐 목사가 천박해 보이던지,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에겐 목사가 아주 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목회 선상에선 늘 이리저리 핀잔과 동네북 형편이 되고 반은 멍청한 사람처럼 되지만, 죽어가는 환자에게 목사가 귀한 신분이 되어서 한마디의 말씀에도 경청하는 경우를 본다. 즉 실존적 만남을 경험한다. 그래서 장례식은 목사에게 가장 큰 명예가 돌아간다.

필자의 셀폰에는 죽어가신 분들의 전화번호가 가득하다. 모두가 사연이 많은데 그렇기에 지우기가 싫다. 모두가 기나긴 대하소설이라 그래도 놓아두고 시간이 조금 여유로울 때 꺼내 보려 한다. 긴 여운으로 일생을 살아간 분들의 삶의 훈계를 듣고 싶어서이다.

우리가 공부하고 배우는 영역엔 이론 신학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성경 신학, 조직신학, 역사 신학 등이 있다. 그런데 신학이 현장하고 연결되지 않아서 헤매는 경우는 많다. 물론 신학은 실천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움이 있지만 이론 신학의 강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군인이 전쟁하기 위해서 존재하지만, 여기에는 많은 내용을 갖고 가야 한다. 정훈교육, 내무생활, 제식훈련, 군인정신, 때론 작전 행정 등등이 요구되듯이 잘 준비된 병사는 전투를 잘하게 된다. 그렇듯 이론이 잘 깔려 있어야 현장 목회에 강점이 있게 마련이다.

교회에 등장하는 위기와 변수들은 늘 상존한다. 이단들의 침습, 교회에 와서 목소리 키우려는 사람들, 친교의 불만, 목사의 설교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역전의 용사들 등등 교회는 생물과 같다. 변수가 교회를 교회 되게 하고 교회를 성장하게 하지만 어렵게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배웠던 신학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 이것이 이론 신학이다. 그러나 어떻게 적용할 줄 몰라서 목사라도 방황하게 된다. 그런데 교회는 자연치유력처럼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도 많다. 해법이 없다는 것을 성도들은 더 잘 안다. 그저 석 자가 된 코로 겸손히 기도할 때 동력이 되어 줄 때가 있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죽음과 관계 해서다. 신학은 단순한 변수가 아닌 더욱 근본된 것을 적용하는 힘이랄까? 죽음과 같은 영역에 신학이 현장과 연결해야 한다. 목사는 어차피 죽음을 다뤄야 하는 소명 직이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죽음에 관한 교육이 필요하지만, 설교 속에 종종 나눔도 요구된다. 죽음은 지상에서 영화(Glorification)로 삶이 연장되는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경을 자주 들춰보고 큰 위로로 삼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바쁜 여정 속에 죽음을 생각지 못하고 고통이 임하면 싸우다 생을 마감한다.

영성의 귀중함을 죽음 앞에서 인식하거나 하지만 많은 경우는 그렇지도 못하다. 유리 벽에 가려서 금방 영성이 이해되지도 않는다. 아울러 삶의 환경이 녹녹하지도 못했다. 일본강점기, 한국전쟁, 보릿고개, 근대화 등등의 삶에 치여 살다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든다.

평생 자신을 위해서 산일이 없는 어르신들이 많다. 이런 분들의 도식 속에 영성이란 생소한 면이 있다. 그래서 채플린이란 이름으로 목회적 돌봄이 앞설 경우가 많다. 심방하는 목사님처럼 심방의 형식을 빌리는 것이 이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목회적 돌봄(Pastoral Care)이라는 아주 좋은 선물을 주님이 주셨고 환자는 이런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관을 정립하는 경우도 본다. 죽음과 신학은 필연적 관계이면서 인간론과 인간을 대하는 인식이 점점 진보를 이루는 것이 신학의 발전이 아닐까 감히 소고(小考)해 본다.

김영준 목사(미국 애틀랜타 성도장로교회 담임, 센트럴신학대학원 겸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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