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의 길잡이와 동역자인 조사(助事)와 영수(領袖)의 사역

오피니언·칼럼
강석진 목사의 북한교회사 이야기(12)
강석진 목사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어와 풍습과 문화를 익혀야 했고 전도를 위해서는 현지 조선인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초기 선교사들에게는 변변한 언어 교제나 사전도 없었기에 조선 현지인들의 도움이 사사로운 것까지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이들 조사는 단순한 사역의 보조적인 일로부터 점차 선교사들의 동역자로서의 역할을 분담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조사로서 한석진, 백홍준, 서상륜, 서경조, 김창식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언어 선생이기도 했고 선교사들이 전도 여행을 할 때는 길잡이가 되었고 성경에 대해서는 선교사들로부터 배움으로 사역의 동역자로 점차적으로 전환되었다. 감리교의 김창식 경우는 선교사의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하다가 후에는 사역자가 되어 감리교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이기풍도 회심한 후에는 원주까지 따라가서 스웰렌 선교사에게 밥을 해주는 섬김의 활동이 있었다. 사도 시대에도 바울에게 바나바와 실라와 디모데와 아굴라 등이 있었기에 사역이 현지화 되고 효율적으로 감당했던 사례와도 같았다.

한국교회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사무엘 마펫 선교사의 경우는 그에게 한석진이라는 의주 출신의 사역자가 있었는데, 그는 조수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지혜롭게 잘 감당했다. 그는 조사로서 마펫과 함께 1894년에 평양 최초의 널다리골 교회를 개척하는 데에 일등 공신이었다. 한석진 조사는 후에 평양 신학교를 수료하고 1907년에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조사들을 단지 자신들의 사역에 보필자로만이 아닌, 사역의 동역자로 여기며 저들로 하여금 전도와 교회 개척과 운영에 현지인 파트너로서 인정하며 지도자고 세워 나갔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조사를 지역적으로 세워 저들이 그 지역을 감당케 하였다. 평북도에는 김관근을 조사로 세웠고, 평남지역은 한석진을 세워서 저들에게 일정한 권한과 책임을 주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하였으며, 길선주를 장대현 교회의 영수이자 황해도 지역의 조사로 임명하여 섬기도록 하였다. 마펫 선교사는 전도 여행을 조사와 함께 하거나 저들이 자발적으로 전도를 하게 한 후 결신자들에게 학습과 세례와 성찬식을 선교사가 하도록 하는 역할 분담 사역도 하였다. 선교사들이 선교 초기에는 조선인들과 충분한 의사 소통이 안 되었기에 조선인들의 신앙 상태를 조사들이 잘 확인한 후에 선교사가 이들에게 세례를 준 것이다.

김상현 조사는 1905년에 조사로 마펫 선교사와 함께 사역을 하다가 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평북노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는1919년 3.1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이로 인해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에는 공산당 폭도에 의해 순교를 당하였다. 그는 마펫 선교사에게는 마지막 조사였고 한국 교회사에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폭 넓은 사역을 한 조사 출신의 사역자였다.

선교 초기에는 조사 직분 제도뿐만 아니라 영수 직분 제도도 있었다. 교회가 평신도에 의해 자체적으로 곳곳에 많이 세워졌지만, 이러한 미자립 교회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전문 사역자들을 많은 교회에 배치하는 것이 매우 부족한 현실이었다. 그런 열악한 교회 환경 속에서 그에 대한 차선의 방법으로 선교사들은 그 교회의 평신도 사역자들을 그 교회에 지도자로 세웠는데 이들을 영수라고 불렀다. 한국 교회사에서 최초의 영수는 1894년 마펫 선교사가 임명한 평양 장대현교회의 이영언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의하면 한석진도 신학교에 가기 전에 장대현 교회에 일시적으로 영수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일설에는 1866년 토마스선교사를 참수했던 박춘권은 1894년에 평양 대동문 안 널다리골에 교회가 최초로 세워지자, 그 소문을 듣고 마펫 선교사를 찾아와 자신이 지난 날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그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영수가 되어 교회를 이끌었다고 한다.

당시의 총회 회의록에 의하면 "영수는 투표로 택하고 기한을 정해 당회가 임무를 부여한다"라고 되어 있다. 초대 한국 교회 성장에 영수가 끼친 공헌은 지대했으나 점차 교회가 조직화 되고 목회자 수급 문제가 해소되면서 점점 그 직분은 사라져 1950년대 후반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러한 영수 제도는 중국에서도 있었다. 중국이 등소평에 의해 1978년 이후 개혁 개방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자, 곳곳에 가정 교회들이 세워지고 평신도들이 자체적으로 선발한 지도자가 설교를 하면서 교회를 이끌어 갔었으나, 점차 중국 종교국에서 신설하거나 재건된 신학교와 도심의 큰 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전도자 교육을 실시하여 평신도 교회 사역자들을 배양함으로 저들이 각 교회의 사역자로 자리를 잡음으로 영수 제도와 같은 교회 직분 제도가 사라졌다. 이런 과정에서 성경과 신학에 대한 수준이 미치지 못함으로 이단적 문제들이 빈번히 발생되기도 하였다. (계속)

강석진 목사(「근현대사로 읽는 북한교회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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