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이스라엘,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종교 비극의 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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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마지막 손자 아람

탈레반의 수중으로 들어간 아프가니스탄-복음의 길은 간단치 않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이 결국 다시 탈레반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마음이 아프고 쓰리다. “전쟁 준비야말로 평화를 지키는 가장 유효한 수단의 하나”라는 미 초대 대통령 G. 워싱턴의 미 의회 연설을 간과한 결과다.

미국은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에서 동일한 실수를 거듭 범했다. 미 키신저와 월맹 레둑토의 평화협정은 이들에게 노벨상을 선물하였으나, 실은 (남)베트남 멸망의 전조였다. 아프가니스탄 평화협정이란 것도 사실은 베트남의 경우처럼 탈레반의 승리를 예견하는 휴지조각 맹세에 불과했다. 혹여 철수를 하더라도 대국인 미국은 유엔 등에 관리와 통제를 의탁하던지 좀 더 정밀한 방식으로 신앙인들과 노약자들과 여성들과 탄압이 예측되는 관련 인력 등 배려를 했어야 했다.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에릭 프롬(Erich Fromm)은 "주전 1500년부터 주후 1860년까지 영구적인 평화보장을 전제로 하는 평화조약이 약 8천건 체결되었으나 그 효력이 지속된 것은 평균 2년"이라 했다(

). 한반도의 좌파들이 왜 그리 종전 선언, 평화 협정, 미군 철수에 집착하는지 짐작이 간다. 즉 평화협정이란 평화를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사기인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프롬의 이 명구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이슬람 국가 아프가니스탄이나 베트남과는 전혀 다르다. 자유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아프가니스탄이나 베트남과 달리 주도적 국격 성장을 이루고 종교적 자유를 체험한 국가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가 있는 한 대한민국은 유물주의 공산주체귀족들의 꼼수에 쉽게 넘어갈 만큼 그리 만만한 나라는 아니다. 그리고 일부 정치군인들로 시끄럽기는 하나 여전히 6.25의 시련을 극복하고 견고하게 잘 준비된 군대가 있다.

아프가니스탄까지 진출한 아랍어 문양 ©독일 페라가몬박물관 전시물

아무튼 아프가니스탄은 대영제국과 구소련에 이어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평화가 온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승리가 전부가 아니다. 다민족, 다종족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의 진정한 평화는 여전히 멀기만 하다. 강한 수니파 이슬람의 탈레반을 보며 오히려 시아파 종주국 이란과 중국이 긴장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라크 희대의 독재자 후세인이 부시에 의해 제거되었음에도 오히려 중동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더욱 심한 핍박과 고통의 수렁 속으로 빠져버린 아이러니와 유사하다. 이슬람 영역 속에서 독재자 후세인은 오히려 그리스도인 부통령을 세울 만큼 세속 통치 가운데 절묘한 종교 균형을 유지했던 인물이었다. 이 종교적 역설과 아이러니를 기독 역사가들과 정치인들은 무어라 평가할까?

하나님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었던 다윗은 기도만 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 용사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이어 탁월한 전사였던 다윗으로 인해 오늘날 이스라엘의 기반이 잉태한 것이다. 평화는 기도만으로 오지 않는다. 단세포조차 갖추지 못한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 그 많던 신유 은사를 받았다던 기도의 사이비들은 모두 어디로 숨어버렸단 말인가! 정말 신유 은사를 가졌다면 지금이 그 때를 위함이 아니던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하나님은 책상 신앙과 책상 신학도 일거에 뒤집어 엎어버리셨다.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는 피조물인 인간의 상상을 초월해 계심을 늘 기억하라!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생각은 죄악 된 피조물인 인간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 했다(사 55:8-9).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당하고 순교를 했던가. 필자 지인의 동생 목사도 수년전 아프가니스탄에서 순교를 당하였다. 복음은 단순하다. 하지만 기도하고 순교해도 복음의 선한 길은 여전히 그리 만만치가 않다.

순교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 후서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7)고 고백한다.

우리가 살펴볼 노아의 마지막 손자요 성경 무대의 중심 민족이 된 아람도 아르박삿 후손인 이스라엘과 더불어 복음에서 점점 더 멀어져만 가고 있으니 가슴이 미어지기만 한다. 아프가니스탄과 더불어 21세기 가장 종교적 비극의 민족으로 남은 시리아(아람)는 도대체 성경 속 어떤 민족이었을까?

아람(시리아) 족의 흥망

11세기 성경, 튀니지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아람어 탈굼(Targum)이다. 이라크에서 발견됨/Schøyen collection ©위키피디아

아람은 “높고”, “고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70인 역은 아람을 '수리아(시리아)'(Suriva, Syria)로 번역하고 있다. 아람은 성경뿐 아니라 역사 속에도 자주 등장하였다. 역사상 아람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애굽 제 1왕조 시대(BC 3100 경)나 아카드어로 기록(주전 27세기-23세기 경)된 문헌에서 아람을 찾을 수 있다.

아람 사람에 관해 보다 분명한 언급은 마리 출토의 아모리어 텍스트나, 우가리트 출토의 토판(土板)에서 발견된다. 주전 23세기 아카드 왕 나람신(Naram-Sin)의 설형 비문에서는 뚜렷하게 아람 족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후 아람은 여러 비문에 등장한다. 주전 14세기 중엽 아카드어(신바벨론어)로 저술된 애굽에서 발견된 유명한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 토판에서도 아흘라메(Ah˘lame=`연합자)라는 이름으로 아람 족을 찾을 수 있다.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I 세(주전 1115-1076)는 앗수르의 서부 지역에 침입한 아흘라메를 물리치면서 아흘라메를 아람 사람으로 지칭하고 있다. 앗수르의 번영 시대에도 아람족은 만만찮은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앗수르 제국이 점점 더 강성해짐에 따라 아람 도시들은 하나 둘 앗수르에게 점령을 당하기 시작한다. 앗수르 인들은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한 후(주전 722) 이스라엘인들을 아람 족속이 살던 땅으로 이주시켰고, 그 땅에는 반대로 아람 인들을 이주시켜 살게 했다.

앗수르에게 많은 지역을 빼앗긴 아람 족속들은 한때 신 바벨론을 도와 앗수르에 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람 족속은 오히려 바벨론에게 동화되어 점차적으로 역사 속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남북 시대,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헤시온, 주전 940-915, 왕상 11:23-25; 15:18), 다브림몬(주전 915-900, 왕상 15:18), 벤하닷 1세(주전 900-860, 왕상 15: 18-20), 벤하닷 2세(주전 860-841, 왕상 20장), 하사엘(주전 841-806, 왕하 8:15), 벤하닷 3세(주전 806-770), 르신(주전 750-732) 등으로 이어지던 아람 왕국은 이스라엘보다 10년 먼저 문을 닫게 된다. 그리고 광활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걸쳐 있던 아람 족의 행동반경은 지금의 시리아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이후 오랜 기간 타 민족의 억압과 핍박을 견디어 온 시리아는 1946년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비로소 지금의 시리아로 독립하였다.

아람과 이스라엘 민족

Carpentras 석비는 1704년 남부 프랑스의 Carpentras에서 발견된 비석으로 최초에는 페니키아 알파벳으로 쓰여진 것으로 알았으나 1821년이 되어서야 "아람어"로 확인된 최초의 고대 비문이다. 시적 형태의 비문은 Charles Cutler Torrey에 의해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오시리스 신의 신봉자인 타하피의 딸 타바는 복이 있다./그녀는 아무에게도 악한 일을 행하지 않았고 어떤 말을 해도 비방하지 않았다./Osiris 앞에서 당신은 축복을 받으라. 그 앞에서 물의 선물을 받으십시오/당신은 (그의) 숭배자가 되십시오./나의 아름다운 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그의 성도들 사이에서 완전하십시오."

성경에 보면 아람과 이스라엘 민족은 같은 셈의 후손이면서 근접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끊임없는 접촉을 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아람 땅이라 불려지는 곳은 단순한 아람 후손들의 땅이 아니었다.

아람의 주요 도시 하란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이주한 땅이었으며(창 11:31; 행 7:2,4) 그는 그곳에서 죽었다. 아브라함과 나홀의 형제 가운데 하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가 있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아람 땅 하란은 나홀과 그 자손들,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 하란의 아들 롯, 브두엘, 라반의 마음의 고향이었다(창 22:20-24; 24:4,7,10; 25:20; 28:2). 아브라함과 그 가족은 롯을 데리고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다(창 12:4).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을 하란 땅으로 보내면서 하란을 자신의 고향, 내 족속이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창 24:4).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사촌형 브두엘의 딸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다(창 24장). 조카와 결혼한 셈이다.

모세는 자기 조상에 대해 '유리하는(떠돌아다니며 살던) 아람 사람'(신 26:5)이라 고백한다. 브두엘도 당연히 아르박삿의 후손임에도 성경은 그를 아람족속으로 소개한다(창 25:20; 28:5). 이삭과 리브가의 아들 야곱도 밧단 아람에 사는 그의 외삼촌의 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았다(창 28:2-5). 야곱과 같이 가나안으로 돌아온 여자들 중 적어도 레아와 라헬은 히브리 사람의 조상이 된 아람 사람이었다. 야곱은 외삼촌인 동시에 6촌 지간이기도 했던 라반의 딸들과 결혼한 셈이다. 아람 사람 라반은 이렇게 야곱의 장인어른이 되었다.

사사시대를 거쳐 다윗왕에 이르러 아람은 이스라엘과 치열한 물리적 충돌을 시작한다. 다메섹의 북쪽 레바논 산중에는 `소바'라고 하는 강력한 왕국이 있었다. 그 동쪽 경계에는 유브라데 강까지 미치고 있었다고 한다(삼하 8:3).

​소바는 유브라데 강 지방에서 `비돌'이나 `무도기누'라는 앗수르의 성읍들을 앗수르 라비 Ⅰ세(주전 1012- 972)에게서 탈취했다. 다윗이 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 에셀을 쳐서 마병 일천 칠백과 보명 이만을 사로잡고 병거(兵車) 일백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 병거의 말은 모두 발의 힘줄을 끊자 다메섹 아람사람들이 소바왕을 도우러 왔다고 했다(삼하 8:3-5). 아람과 소바 왕국이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다윗은 이 전투에서 아람 사람 이만 이천을 죽였다(삼하 8:5-8,10:15-18). 이때부터 아람은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람의 일부 장군은 다윗의 수하로 들어왔다. 다윗의 37용사 가운데 이갈이라는 장군은 소바 출신이었다(삼하 23:36). 다윗은 가장 중요한 측근 경호원들도 이방 그렛 사람(삼상 30: 14; 삼하 8:18; 15:18; 20:23; 대상 18:17)과 블레셋 사람들을 채용하였다. 친인척과 지연, 학연에 의지하여 측근들을 중용하다가 인사(人事)를 그르쳐 주변 사람들을 줄줄이 철창신세를 지게 만드는 우리 조국 지도자들의 미숙한 행태를 볼 때 다윗의 용병술은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솔로몬의 평화로운 통치 시기에도 아람은 이스라엘의 조공국가로 남는다. 하지만 아람이 마냥 이스라엘에 고개를 숙인 것은 아니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아람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이후 북 이스라엘 왕국에 큰 위협이 되는 세력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특히 북 이스라엘의 7대왕 아합 당시, 북 이스라엘은 벤하닷 1세가 통치하던 아람과 큰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선지자 엘리사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문둥병을 치료받고 돌아간 나아만 장군이 바로 이 당시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다. 신앙심이 없던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아람에게 빼앗겼던 길르앗 라못을 정복하려고 전쟁을 벌이다 결국 아람 병사의 화살을 맞고 죽고 말았다.

아합 뿐이 아니었다. 아람 족은 끊임없이 북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와 전쟁을 치렀다. 성경에 기록된 전투만 보아도 북 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을 비롯하여, 3대 왕 바아사, 9대왕 여호람, 10대 왕 예후, 11대왕 여호아하스, 12대왕 요아스, 13대왕 여로보암 2세 통치 때 치열한 공방과 전투가 있었다. 심지어 남 유다와 아람(시리아)이 벌인 3대 전투(4대 여호사밧, 6대 아하시야, 8대 요아스 왕 시절)의 승리자는 아람이었다(왕하 8:28-39, 대하 18:28-34; 대하 22: 5-6 참조).

6일 전쟁. 105mm 포가 장착된 이스라엘 기갑부대 Centurion 탱크가 Negev에 서 있다. 1967년, 사진 Fritz Cohen ©National Photo Collection of Israel, Photography dept. Government Press Office

이 같은 이스라엘과 아람 민족 사이의 끊임없는 공방은 오늘날 소위 ‘6일 전쟁’까지 그 끈질긴 악연을 이어가고 있다. 1967년 6월 7일 발생한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아랍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이었다.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이스라엘군은 요르단 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으며 현존하는 유일한 고대 유대교 성전인 바위의 돔과 서쪽 성벽을 장악하였다.

조덕영 박사

​외견상 양적으로 우세한 듯 보였던 아랍 동맹은 이스라엘의 기습 선제 공격 앞에 속절 없이 무너져 버렸다. 훗날 6일 전쟁이라 불리게 되는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요르단의 요르단 강 서안을, 시리아 방면의 골란 고원을, 그리고 이집트의 방면의 가자 지구와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정복하였다. 이스라엘의 일방적 승리였다. 이때 차지한 아람(시리아)의 영토 골란 고원은 과거 이스라엘의 유서 깊은 도피처가 있던 곳이었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이 도피성 지역을 양보할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두 민족은 좀처럼 복음에도 반응하지 않고 멀어져만 가고 있기에 더욱 안타까울뿐이다. 이렇게 인간의 역사란 경쟁과 갈등과 전쟁의 역사다. 이 속에서 예수님을 제외하고 죄 없다 할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어디 있을까?(시 51:5) <계속>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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