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비대면 예배의 문제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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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교회론

1장 왜 교회에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가?

김재성 교수

슬프게도 우리 한국교회는 지금 교회에서 개최되는 집회에 참석하지 말라는 지침을 놓고, 정부 방역당국과 교회 사이에 점점 대립하는 양상이다. 전염병을 관리하는 정부 당국자들이 집회 금지령을 발동하여 교회의 모임을 제한시키고 있다. 금지 조치를 강요하는 정부에게는 다소 유리한 명분이 있었다. 2020년 초, 대구 신천지 집회는 불특정 다수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확산시키는 진원지 역할을 했었다. 이들은 이미 사이비 재림 교주를 따르는 이단으로 규정된 단체인데, 비상식적인 행사들을 진행하여 사회적 공분의 대상이 되었다. 그 후로 한국교회는 거의 다 예배 금지 조치에 호응하여 방역대책에 협조하게 되었지만, 거의 2년 가까이 오랜 시간이 경과 되면서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아예 일부에서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잘못된 율법주의라고 비난하는 입장과 맞서야만 할 정도이니, 참으로 교회 내부적인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1. 주님을 기다리며, 천국 소망을 품다

참되고 올바른 예배는 성경에 지시된 내용들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방식으로, 적합한 장소에서, 경외하는 마음으로 올려야 한다. 모든 믿는 성도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 교회의 집회에 성실하게 참여하여, 성도 간의 교제와 격려를 나누는 가운데서 힘을 얻는다. 서로의 교제를 통해서 심적인 지원을 받으며, 영적인 성숙과 도덕적 덕을 함양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를 통해서 성경적 교훈을 받아야 한다. 모든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교회처럼 보이지만, 기독교 정통신앙과는 전혀 거리가 먼 집회들과 기도 모임들도 상당히 많다. 경건한 훈련으로 위장을 한 사이비 단체들의 모임도 있고, 이단적인 교리로 속이는 자들이 영혼을 미혹하는 집회를 갖기도 한다. 한 동안 세상을 흔드는 세력처럼 보였던 신천지의 이만희, 전도관이나 구원파 등등 많은 가짜들의 최후를 목격한 바 있다.

참된 성도들은 오직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만을 따르는 양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도 함께 하시며,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어서 교회를 이끌어 주신다. 모이는 습관을 실천하는 참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교회에 모이는 성도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지원하며, 양육을 받는다. 이로 인해서 성도는 영적인 양분을 공급받기도 하고, 다른 성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교회의 정기적인 예배와 경건한 기도회, 소그룹 성경공부, 제자훈련 과정, 봉사담당자로서 맡은 부서의 행사 등에 참여하는 성도만이 책임감을 갖게 되고, 자신의 믿음을 연습할 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의 모임이 가장 결정적인 요체이다.

예배는 성도들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의무사항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여, 믿음의 반응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였을 뿐이다. 절대로 강압적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겁을 주거나, 압박을 하시지 않으셨다. 진심으로 받은 바 은혜가 넘치고, 헤아릴 수 없어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범사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여 하나님을 향해 경배를 올리는 것이다.

특히 각자 소속된 지역 교회에서 모이는 공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역시 기계처럼 시간표에 따라서 나아가 단지 출석했음을 확인받는 사항이 아니다. 또한 반드시 주일날 오전시간에만 어떤 형태로든지 참가를 해야만 하는 의무사항도 아니다. 일주일의 첫 날,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 뿐이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편리한 방식대로 아무 곳에서나, 자기가 참여하고 싶은 시간에 인터넷에 접촉해서 예배를 올리는 것으로 그저 일시적이며, 임시적인 비상상황에서 해결방안일 뿐이다. 경건의 삶을 유지하려면, 개별 성도가 혼자서 제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된다. 컴퓨터나 동영상 매체에서 다양한 정보와 자료를 얻어서, 나태해지지 않도록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모이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채, 임의적으로 편리함과 나태함에 젖어서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습관”이 들어서는 안된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서, 선한 영혼을 가꾸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직장이나, 병원이나, 음식점이나, 마켓 등 자신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곳에는 어떤 악조건에서도 직접 방문하고 있다. 필자는 눈이 많이 내려서 주일예배를 포기하고 오지 않았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너무 많은 성도가 결석했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한 성도는 교회당 옆에 병원에는 출근하면서, 예배 시간에는 나오지 않았음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렇다. 필자는 그 주일에 많은 반성과 함께 새로운 다짐을 했었다.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 한, 내 발로 걸어갈 수 있는 힘이 남아있는 한 반드시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올리자고 결심했었다.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이처럼 먹고 살아가는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않고 열심을 낸다. 사람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고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과연 예배를 올리는 일에도 그처럼 열심을 내고 있는가? 하나님께 예배를 올리는 일에는 그정도의 열심히 없다면, 나쁜 습관에 젖어있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바, 초대교회 성도들은 미래를 기대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hope)을 품고 살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이 임박하였음을 굳게 확신했고, 최후 심판을 준비하면서 죄를 멀리하고, 날마다 깨어있으면서 경건한 삶을 추구했다. 이들의 종말론적 신앙은 하늘나라에서의 영생을 소망하는 것이다. “그 날”이 도적같이 올 것이라고 믿었기에, 승리의 소망을 가진 성도들이 교회에서 집회로 모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성도들이 가진 참된 ‘소망’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것이요, 이러한 영적인 소망은 우리가 그분과의 연합관계에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성도 각자가 가지고 살아가는 “소망”이란 하나남께서 펼쳐나가시는 미래의 정점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참된 소망은 믿음과 사랑으로부터 분리할 수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시간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부정적인 생각에 빠진다. 예를 들면, 수능시험을 앞에 둔 고등학교 학생들 중에서 걱정과 불안에 휩싸여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바라본 미래의 소망은 그렇게 부정적이거나, 체념적이거나, 패배주의에 빠졌던 것이 아니다. 주님의 재림을 긍정적으로 기대하면서, 내일에의 선한 소망을 품고 살았기에, 기쁘고 즐거운 기다림으로 (positive expectation of good future) 가슴이 벅찼다.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준비상태와 같았다. 다만, 신랑이 더디 오게 되면서, 졸기도 하고 나태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마 25:5).

한마디로 압축하면, 종말론적 신앙을 나누던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 날”을 향한 설레임을 갖고서, 함께 예배를 올리고 서로 신앙과 사랑을 나누는 교제와 교육을 위해서 모이기에 힘썼다. 그러나 신랑이 더디 오면서, 매일같이 동일한 종말 신앙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버티며 살아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따라서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의 영생에 대해서는 헛된 의구심이나 왜곡된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모임을 갖고서 바른 교훈을 전달하면서 힘을 불어넣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종말 신앙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히브리서 3장을 살펴보자. 이 서신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심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앙인들은 미래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한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첫 서두에서부터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의 탁월함을 증거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보좌에 앉으셨느니라”(히 1:3). 따라서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또한 ”바라보자”(히 12:2)고 권고한다. 유대 전통과 구약성경에 탁월한 이해를 제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역과 다시 오실 미래적 희망을, 기독론과 종말론의 조합이 가장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날”이 바로 가깝기 때문에 열심히 모이라고 권면한다. 참되고 온전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함께 모인 성도들이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다. 이런 집회를 거부하는 자들은 잘못된 습관에 빠진 자들이다.

...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2-25).

왜 초대교회 성도들이 서로 모임에 나오기를 권면하면서 살았던가? 어째서 그들은 모임을 폐하려는 자들의 “습관”과는 달리, 열심을 내고 부단히 모이는 일에 대해서 다짐을 했던가? 왜 모이지 않는 자들의 습관이 나쁜 것인가? 왜 우리는 교회에 모여야만 살 수 있는가?

위에 나온 구절은 성도가 다른 기독교 신자와 인간적인 접촉 혹은 친교 모임을 더 많이 하라고 촉구하거나, 차를 마시고 담소하면서 친숙해진다거나, 성도 사이에만 식사를 자주해서 깊이 사귐을 갖도록 하는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라는 조언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기독교의 종말신앙을 배경으로 하고서 모임을 갖도록 촉구하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낙심한 영혼들과 고난과 박해 속에서 흩어진 성도들을 격려하여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인내와 영적 투쟁에 관련되어 있다. 또한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배와 관련된 영적인 교제의 모임에 대해 격려하는 것이라고 첨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히브리서에는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의 대조가 나온다. 옛 언약은 이 세상에 관계된 것들이다. 새 언약은 장차 다가올 세상에 관련된 것이다. 믿음을 가진 자들은 이미 새롭게 되었고, 장차 올 세대에 접속되어 있다(히 6:5, 9:11, 10:1).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 세상을 깨어버리고 들어온 종말의 시작이었다. 예수님의 모든 구속사역들은 자연 법칙으로 움직이는 세상의 질서 속에 비상적인 긴급조치들이 개입한 사건들이다. 바울 사도의 서신들에 보면, 현재의 세상은 악하지만 장차 올 세상은 순결하다고 대조하였다. 히브리서에서도 불완전한 이 세상과 완전한 미래가 대조적으로 나온다.

히브리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옛 언약과 새 언약,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의 대조에 주목하여야 한다. 거기에다가, 두 가지 언약과 세상의 각각의 특징을 파악하고, 이 두 가지 대립 관계 사이의 관련성이 무엇인가를 파악하여야 한다. 이 편지는 구약성경에 익숙했던 유대인들이나,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보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스 박사가 히브리서를 이해하도록 제시하는 기본적인 구조는 옛 언약 속에 새 언약이 미리 제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구약 언약에는 하늘나라의 실체가 표상적으로 제시되어 있고, 새 언약의 시대에 도래하는 것들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구약 시대에 나온 것들은 새로운 언약에 비교하면 매우 열등한 것이었다.

특히, 보스 박사는 세 가지를 대조하였다. 히브리서의 가르침에서 독특한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사역의 탁월함인데, 구약의 언약과 새 언약의 대조가 가장 기본적인 교훈이자 대조를 이룬다.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 13장 10-12절에서 구약시대의 성막과 제단에서 올린 제물보다 위대하신 속죄사역을 대조시킨다. “여기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고, 우리가 장차 올 것은 찾는다”하는 종말론적 전망을 확고히 심어주었다. 보스 박사가 요약한 두 가지 언약에 대한 대조는 다음과 같이 요약 되어질 수 있다.

첫째, 장소: 옛 언약은 땅 위에서 이뤄진 것이다. 새 언약의 중심지는 하늘나라다.
둘째, 본질: 옛 언약의 본질은 육체적인 것이다, 새 언약의 본질은 영적인 것이다.
셋째, 효력: 옛 언약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고, 희미하여 실패했다.
새 언약은 역동적이며, 영원히 함께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안목을 갖고서, 히브리서 10장 25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계속)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 명예교수,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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