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은 믿음을 변호한다

오피니언·칼럼
기고
류현모 교수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변호하는데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세계관이 너무 학문적이고 현학적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한 기독교 변호보다는 전도에 힘쓰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많은 사람이 기독교의 복음을 들어봤거나 교회를 다니다가 중단한 포스트기독교 사회에서는 전도할 때 강한 반발과 공격적인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기독교에 대한 변호가 먼저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과 세계관은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에 의해 각각 재건된 성전과 성벽의 관계와 유사하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다. 포로에서 귀환한 스룹바벨에 의해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지만 귀환한 이스라엘의 믿음의 재건을 의미했다. 그러나 성전이 재건되고 반세기 이상이 지났음에도 예루살렘은 무너진 성벽과 불탄 성문으로 인해 성안의 백성들과 성전을 외적으로부터 지킬 수 없는 상태에서 느헤미야서는 시작한다. 이처럼 기독교 세계관의 성벽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성전과 같은 신앙은 외부의 공격에 취약하며 무너지기 쉽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다른 세계관으로부터 다양한 방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공격받고 있다.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 철학과 과학에 의해, 초자연을 부정하는 무신론 신학과 철학에 의해, 영적인 것을 부정하는 무신론 심리학에 의해, 절대적 도덕률을 부정하는 상대주의 윤리학에 의해, 하나님이 제정한 결혼과 가정이라는 기본적인 사회제도를 부정하는 사회학에 의해, 절대적인 정의를 부정하는 법, 정치, 경제학 등 전 학문분야에 걸쳐 공격받고 있다. 자기가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기독교에 대한 공격은 나름 공부해서 방어하려는 노력을 하지만, 스스로 무지하다고 느끼는 부분에서는 우리 신앙을 공격해 오는 상대에 대해 자연히 뒷걸음치게 되고 방어의지를 상실하게 된다.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느 1:3) 느헤미야가 수산성에서 전해들은 예루살렘의 소식이 지금 내 형편과 같지 않은가?

나의 경우에도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50대 중반에서야 알게 되었고, 그때서야 세계관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세계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공부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는데 전략이 필요하며, 느헤미야가 좋은 모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귀환한 유대인들은 초라하지만 성전을 재건하고 에스라의 인도로 말씀을 듣고 예배를 시작한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과 불타버린 성문은 그들의 성전을 지켜줄 수 없는 상태였다. 느헤미야는 첫째, 현실을 신속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우리의 신앙을 변호하지 못하는 내 세계관의 취약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완전하지 못하지만 속전속결의 성벽재건을 마치는 것이다. 취약점이 발견되었으면 그 부분에 대해 신속한 복구가 필요하다. 셋째, 철저한 분업이 필요하다. 성벽의 복구는 각자 자신의 집 가까이의 성벽을 복구하였다. 이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세속 세계관의 거짓을 분별하고, 믿음의 공동체에 그 지식과 믿음을 전파하여 서로 보완하는 것이다. 비록 크지 않더라도 성벽이 완성되면 넷째, 외부세력의 유입을 분별하여 수용할 수 있고, 내부의 오염된 세력을 정결하게 할 수 있다.

세계관을 정립하는 과정 중에는, 내가 세우고 있는 세계관의 연약함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비웃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느헤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쌓고 있던 성벽에 대해 그 대적들이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느 4:3)라고 말했던 것처럼 내 세계관의 형편없고 연약함을 놀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성벽 쌓기를 방해하려는 대적들의 계략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그들은 놀라고 당황하는 것이다. 성벽을 완성하고 성문을 닫으면 누구도 성전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오스 기니스는 <풀스 톡, Fools Talk>에서 “죄란 나 자신의 권리와 관점을 주장하는 일이다. 즉 하나님과 그분의 관점인 진리를 고의로 거부하는 일이다.”라고 규정한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하나님을 탓했던 것처럼 타락한 인간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려 한다. 그것이 인간의 원죄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도 하나님을 피고석에 세우고 모든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곤 한다. 우리의 변증이란 무죄한데도 억울하게 무고를 당하시는 하나님을 위한 합리적 변호이며, 최후의 날까지 그 변증은 멈출 수 없다.

우리가 변호하는 분은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이며,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위해 힘써 변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스 기니스는 “변증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기독교의 변증이 오직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 지적했다. 다윗과 엘리야처럼 나도 이 싸움에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게 된다. 이럴 경우 변증에는 이기고 청중을 잃을 수도 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진리인 것은 우리 변증의 성공 여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신앙이 진리라면 아무도 믿지 않아도 진리이고, 진리가 아니라면 모든 사람이 믿어도 진리가 아닌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스스로 최고의 변증자이고 우리는 보조자이며 증인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변증은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피고석에 계신 그분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명확히 증언하는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 로다.”(롬 1:16) 복음을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세상 헛된 이념의 선전이 거짓된 것임을 분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다.

묵상: 변증에는 이겼는데 복음전파에는 실패한 적이 없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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