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

오피니언·칼럼
칼럼
이경애 박사

복음서에는 대비되는 두 비유들이 자주 등장한다. 다시 오실 예수님이 장차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로 나누시겠다고 하시는 말씀(마 25:32)이나,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넣겠다는 말씀(마 3:12) 등이 그렇다. 아마도 이 비유에서 양이나 알곡으로 비유된 사람들은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 선한 마음과 행실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반대로 염소나 쭉정이는 주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은, 악한 마음과 행실로 세상을 괴롭게 하는 자들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 세상에 착한 이들과 선한 행실만 가득하면 좋으련만 예수님은 재림 때까지 이러한 선과 악이 공존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 예수님은 세상을 그대로 두시는 것일까? 쭉정이 같은 존재들만 없다면 세상은 살만한 곳일 것 같은데 왜 그냥 두시는 것일까? 예수님은 이러한 악의 완전한 종식을 섣불리 기대하지 않으시는 것을 본다. 오히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혀질 것을 염려하신다(마 13:29). 악과 부정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유보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선과 악의 공존의 고통을 외부 세상에서만 찾지 않는다. 자신의 내부에서 다투는 두 마음을 발견하고 절규한다. 내 속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과 악을 행하고 싶은 의도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롬 7:21). 그리고 이러한 자신을 사망의 몸이라고 부르며 괴로워한다. 바울은 자신의 내면에 알곡과 쭉정이, 양과 염소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이 감히 완전한 알곡이며 착한 양이라고 할 수 없다는 실존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완전한 선에 이를 수 없다는 영적 현실을 깊이 깨닫고 있는 것이다. 아, 세상은 왜 여전히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우리는 내 안의 이 두 가지 대립되는 모습에 절망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때로 외적, 내적 세계에 절대선이 존재하기를 기대한다. 어떤 이는 세상의 악이나 부정적인 것이 발견되면 견딜 수 없어한다. 정치나 경제 위기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자신에게 적용될 때 그들은 자신의 작은, 하나의 실수나 허물에도 나는 ‘항상’ 그렇다는 식으로 자신을 몰아세운다. 얼핏 보면 이들은 순수한 절대 선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완전한 이상향을 기대하며 세상과 자신을 엄격한 잣대로 가혹하게 판단하는 심판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심리치료의 한 분야인 인지치료에서는 이러한 이분법적인 생각을 일종의 인지왜곡으로 보면서 이들에게는 중화된 생각, 생각의 중립지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분법적인 생각은 세상과 자신을 흑과 백 같이 극단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고패턴이다. 이러한 생각은 중도와 회색지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반드시’ ‘절대로’ 라는 틀로 상황을 바라보며 그러므로 늘 불 만족스럽다. 그들은 끝도 없는 완벽주의를 지향하지만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늘 불안하다.

아이의 초기 경험에 미치는 양육자의 절대적 영향을 강조하는 대상관계학자 중 도널드 위니컷(D.W.Winnicott)은 바람직한 어머니의 양육태도로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흔히 ‘완벽한 엄마(perfect mother)’가 훌륭한 엄마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는 이러한 완벽한 엄마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러한 엄마의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아이의 자발적인 삶의 즐김을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때로는 실수와 약점, 부족함과 아쉬움이 함께 하는, 즉 '이만하면 됐다'싶은 양육이 오히려 아이의 자발적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삶에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악한 일이 존재한다. 어떻게 악인이 선인보다 잘 사는지, 착한 사람에게 왜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지 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불의와 악에 침묵하고 계시는지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보고 듣고 계신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아니, 외부로 갈 것도 없다. 내 자신을 보면 왜 나는 늘 이것밖에 안되는지, 왜 또 같은 문제에 넘어지는지 절망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해서 얼마나 자학하며 괴로워하는가?

그런데 해결은 비난과 판단이 아니라 오히려 여유와 관용 속에 있음을 본다. 더 잘하려는 완벽주의로 자신을 몰아세우거나 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하는 악을 모두제거하려고 하지 않는 것, 오히려 나 자신에 대해 '이만하면 됐다'고 봐주는 것, 언젠가 악이 사라질 것을 기대하며 판단을 유보하는 것, 이러한 마음이 선한 기대 속에 하나님의 역사를 소망하는 마음이 될 것이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분열된 자아로 고통 하던 로마서 7장이 끝나자 8장에 들어서면서 성령으로 인한 생명의 역사를 기대한다. 이것은 그가 더 이상 자신의 악한 면, 부족한 면에 집중하기보다 선한 일을 행하실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의탁하고 기대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문제에 집중하여 괴로워하기보다, 가능성과 선함에 대한 기대로 자신을 통합된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면한다(롬 12:21). 악의 제거가 아니라 선의 충만함, 선의 압도를 기대하며 권면하는 것이다.

국가고시를 보면 60점 이상이면 합격이다. '이 정도면 됐다'는 전문가들의 인정이다. 합격되었으니 그 후부터 열심히 더 실력을 쌓아 전문가가 되면 되는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이 담긴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60점이면 되는 것이다. 이만하면 됐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나 자신과 세상을 볼 때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아니 더 절망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세상에 만연한 불의와 가난, 고통과 악의 문제를 볼 때 회의가 들기도 한다. 내 자신을 볼 때 여전한 약점과 변화되지 않은 죄성으로 나도 나 자신이 싫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완벽한 제거, 완벽한 치유, 완벽한 회복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한 완벽을 기대할수록 우리는 더욱 자학하며 괴로워진다. 오히려 양이 염소보다 많음을, 알곡이 쭉정이보다 풍성함을 보고 감사하자. 나도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래도 올해 더 선해지려고 몸부림치지 않았는가? 내면의 악한 본성에 절망하기보다 내 안의 성령의 선함이 이 부족함을 덮어주시기를 기대하는 것, 이것이 믿음의 법이 될 것이다. 우리는 로봇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흔들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흙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으로 버티고 이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올해도 나름 열심히 살아온 내 자신과 가족과 이웃을 토닥토닥해주자. 전 세계에 만연한 감염병으로 우리는 전 지구촌이 공동 운명체임을 절감하고 있다. 서로 더 위로하며 완전하지 않아도 버텨내는 서로를 격려하자. 그리고 자신의 이기주의, 완벽주의에지지 말고 사랑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으로 이겨내자.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겨내는 것이 믿음의 삶인 것이다.

이경애 박사(이화여자대학교 박사(Ph.D), 이화여대 외래교수, 예은심리상담교육원장, 한국기독교대학신학대학원협의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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