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북한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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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욱 국방부 장관이 지난 2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군사법원 국정감사에서 북한이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 이모 씨를 사살·소각한 사건과 관련해 “(군이) 단언적 표현으로 국민에게 심려를 끼쳤다”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지난달 “북한이 이씨를 사살하고 시신을 소각했다”고 한 군의 발표를 스스로 뒤집은 것이다.

군은 지난달 24일 ‘국방부 입장문’을 통해 “우리 군은 다양한 첩보를 정밀 분석한 결과, 북한이 북측 해역에서 발견된 우리 국민에게 총격을 가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음을 확인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당시 군 당국은 “시신에 기름을 부었다”는 등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발표했고, 서 장관은 시신 소각의 정황 증거 중 하나로 “40분 동안 불빛이 보였다”고 했다.

그런데 이 같은 군 발표가 있은 직후 북한으로부터 “사살은 했지만, 시신을 소각하진 않았다”는 취지의 통지문을 받은 뒤 여권에서 “군의 발표가 성급했다”는 목소리가 나오자 확신에 찼던 발표는 모호한 입장으로 바뀌었다.

서 장관의 “국민에게 심려를 끼쳤다”는 말을 따져보면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고 결과적으로 시신 소각을 하지 않은 북한군을 잔인무도하게 만들어 버렸으니 사과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사과는 국민에게 한 것이라기보다 북한에 한 것이 된다.

온 국민을 치를 떨게 만들었던 북한군의 국민 사살과 시신 소각 사건을 이제 와서 사실이 아니라고 국방부 장관이 국회에 나와 증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북이 일방적으로 우리가 한 게 아니라고 하면 군이 다양한 경로로 입수했다고 발표했던 사실에 근거한 첩보조차 아닌 게 되나.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만 봐도 국방부의 발표에 문제점을 발견하긴 어렵다. “방독면을 착용한 군인들이 시신에 기름을 부었다”는 등 상세한 장면 묘사는 다른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북측 발표대로 부유물을 태운 거라면 방독면까지 쓸 이유가 없다. 더구나 서 장관은 국회에서 시신 소각을 수차례 언급하며 “만행을 확인했다”고 했다. 이는 한⋅미간의 확실하게 수집된 정보와 첩보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도 청와대와 정부는 북한이 통지문을 보내온 후 “통지서 내용을 보니 우리 군의 첩보 내용이 부정확하다”고 했다. 이런 반응은 국민 입장에서는 참으로 황당하고 혼란스럽다. 청와대와 정부가 우리 국방부 보다 북한의 발표를 더 신뢰한다는 것이 아닌가.

청와대와 정부가 우리 군의 발표에 의문을 제기한 근거는 오로지 북한의 통지문 한 장이다. 그런데 북측의 이 같은 주장은 이미 상당 부분 거짓으로 드러났다. 북은 통지문에서 “정장 결심으로 이씨에게 사격을 가했다”고 했으나 현장 지휘관이 상부의 사격 지시를 못 믿겠다는 듯이 재확인한 감청 내용이 나오면서 허위임이 드러났다. 또 “80m 거리에서 신분 확인을 요구했지만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북은 이미 이씨에 대한 신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북이 통지문에서 “총격을 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신을 소각하지 않았다”고 한 발표도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자신들이 저지른 반인륜적이고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들끓는 우리 국민의 공분이 향후 자신들에게 결코 득이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제사회의 지탄도 부담이 됐을 것이다. 만약 자기들 발표가 사실이라면 북이 우리의 공동 조사 요구에 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결국 이 사건은 북측의 발표대로 사실이 아닌데도 우리 군이 허구를 발표해 국민을 우롱한 것이거나 아니면 군이 정확한 첩보에 근거에 사실대로 발표했음에도 북한이 아니라고 하니 북한 눈치보기에 급급한 청와대와 정부가 아니라고 하라고 지시했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군 내부에서조차 “북한의 일방적 주장에 우리 군 첩보를 다시 꿰맞추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자조 섞인 말들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부의 북한 눈치보기의 실체가 또 다시 드러난 셈이 된다.

국방부가 이제 와서 말을 바꾼 것이 ‘사살은 했지만 소각은 안 했다’는 북한 주장과 입을 맞추려는 것이든 부정확한 정보에 의한 실수를 인정한 것이든 둘 다 문제는 심각하다. 앞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좋게 하려는 의도라 하더라도 이런 식이라면 매번 예속되고 끌려갈 공산이 크다. 국제사회로부터 신뢰 추락과 국가적 망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 거짓 발표로 국민을 우롱하고 기만한 책임은 그냥 덮어질 일인가.

더구나 문재인 대통령은 희생자 아들이 보낸 편지에 답장을 통해 “반드시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 지울 건 지우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렇다면 고인과 유가족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은 뭐가 되고 책임있는 명예 회복은 누가 해 준단 말인가.

정부의 북한 ‘눈치보기’는 이 뿐 아니다. 우리 정부는 지난 13일 열린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관련 첫 번째 회의에 초대됐지만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 주재 유럽연합 대표부 대변인은 지난 13일 올해 북한인권 결의안을 위한 첫 번째 회의가 개최됐고, 한국은 이번 회의에 초대됐지만 회의 전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통지를 해 왔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로버트 킹 전 미국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한국이 북한과의 관계 진전을 위해서 유엔 (북한인권) 결의들에 관여를 꺼리는 것이 분명하다”며 “그러나 불행히도 그다지 성공적일 것 같지 않다. 북한은 한국과의 화해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아 왔다”고 했다. 이 같은 일은 오히려 북한이 더 호전적(belligerent)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북한인권 결의안은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15년 연속 채택돼 왔다. 한국은 2008년부터 11년 연속 공동제안국에 참여했으나, 문재인 정부들어 지난해부터 동참하지 않고 있다. 스스로를 ‘인권 정부’라 내세우고 있지만 북한에는 예외인 셈이다.

국민이 억울한 희생을 당했는데 도리어 그 책임을 희생자의 탓으로 돌리며 북한에 머리 숙이고 국민을 욕되게 하는 정부, 동성애를 비롯, 소수자의 인권은 그토록 부르짖으면서 북한 주민의 참혹한 인권 상황 앞에서는 유독 입을 굳게 닫는 정부, 이 정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가수 김수희가 부른 가요 가사가 떠오른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