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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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현숙 목사

전에 기독교인이 되신 이어령 교수께서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고, 예술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며, 종교는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한다"고 했다.

또 “그래서 종교적 현상은 체험할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이 바로 영성”이라고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초신자분 치고는 과연 석학답게 참으로 가슴이 탁 트이도록 탁월한 혜안이라고 감탄이 되었다.

그렇다!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이란 표현엔 신의 존전에 옷깃을 여미는 신에 대한 거룩한 경외감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안 되는 것을 설명하는”이란 표현엔 그런 자신에 대한 송구함과 겸손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영성인가!

더우기 체험적인 영성은 얼마나 중요한가! 너무도 신비롭고 성스럽고 감격스럽지 아니한가! 그 크신 절대 지존자 앞에서 우리는 점점 작고 낮아지도록 엎드러질 수 밖에 없지 아니한가! 비록 외면적으로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러할수록 우리의 내면은 반대로 점점 잦아들어 비워지지 아니하는가!

그런데 교회사회 안에는 난처하고 곤란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설명해서는 안되는 것을 설명할수 있는 것처럼 부끄럼없이 큰 소리로 설명하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있다. 이에, 주님은 하늘을 우러르며 이 같이 말씀하셨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26)

숨기시고 나타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무엇에 대한 말씀인가?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7)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가 아버지를 안다하여도 아들을 다 알지 못하니 결국 아버지도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님을,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종종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러면 “영을 분별하라”는 말씀과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라는 말씀의 전제는 무엇일까? 이는 다름아닌 먼저 내가 하나님의 영을 받으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성경은 영분별에 대해 변론이 될만한, 외적으로 드러나는 분별의 기준만을 알려주고 있다. 왜 그런가? 본래 우리에겐 무엇을 특히 영의 세계를 온전히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알려주시는 영 분별도 결국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잘 믿으라는 명령 하나에 집결된 것이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2~3)

그럼에도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충만한 영성을 갖지도 못한채, 분별할만한 자격을 갖추지도 못한채, 자기의 기호에 맞는 다른 이들의 영적인 통찰이나 소견 등을 근거로 타인의 신앙을 분석하며 고등비평을 가하는 것을 낙으로 삼으려한다.

이런 자세는 더욱 깊은 영적인 훈련과 헌신의 단계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악령에 속고 있다고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며, 이것이 분별이요, 사명이요, 말씀에 대한 순종인양 담대한 성토를 서슴치 않는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일은 영적으로야 분변함이니라.”(14)

하나님의 사정을 알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뿐인데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을 판단하는 죄요,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려는 죄를 범하는 것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고전2).

과연 우리에게 온전한 분별이 가능한가?

바울 사도 같은 분도 “우리의 보는 것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한 것이요, 우리의 아는 것은 부분적으로 아는 것 뿐이다.”(고전 13:12)고 고백하였다. 많이 알수록 더욱 모르는 것을 깨닫는다는 말처럼, 많이 분별하여도 희미한 부분과 완전치 않음을 깨닫는다는 말씀이리라…

우리에게 겸손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온전치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외적인 악의 세력에서 온전히 자유로울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성령의 역사 속에서 부분적인 악령의 역사가 혹 개입되어 있을지 모르더라도, 하니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눈에 띄는 광야의 불뱀들을 바라보며 그것에 전념하는 것이 아닌, 십자가로 더 가까이 나아가 우리의 주요 온전하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자세이다.

그러므로 겸손 없는 우리의 분별은, 아니, 분별 없는 우리의 분별은 이미 세상의 영에게 한쪽 자리를 내어준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세상 끝날때까지 그치지 않는 어두움을 취할 것인가? 참빛을 취할 것인가?는 우리의 지혜이며 선택이다.

분별은 자신에게 먼저 향하여져야 가장 안전하고 유익이 있으리라 본다. 나의 영이 성령으로 감동되면 내 속에 있는 혼(魂)의 움직임을 파악하게 되어 자기 애(愛)와 자기 의(義)를 대면하게 될것이다. 그리하면 내속에 숨은 본성적인 편견을 극복하도록 이끌림을 받게 될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과의 친밀함 속에서 누리는 분별심과 평안함과 충만함은 생명력있는 성령의 생각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영성이리라…(롬8:6).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박현숙 목사(프린스턴미션, 인터넷 선교 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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