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휴머니스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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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 목사

신구약 성경을 읽어도 성령의 터치를 못 받아 말씀이 역동적인 생명의 은혜로 다가오지 않을 때는 누구라도 그 말씀을 통독하기가 너무도 힘들게 된다. 대개의 경우 이럴땐 성경에 대해 타자가 이성적인 언어로 성경을 논한 종교철학적인 책들에게만 정신이 팔리게 된다.

필자도 과거 이런 상태에서 마치 성경을 간접적으로 읽기라도 하는 기분으로 종교철학 서적을 탐독을 했었는데 쇼펜하워나 니이체, 까뮈나 사르트르, 하이데거 같은 책보단 케엘케갈, 폴 틸리히, 칼 바르트, 부르너, 루돌프 오토 등의 책들이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필자의 아프리오적(?) 인식에 훨씬 좋은 영향을 미쳤음을 뒤에 느낀 바 있다.

감사하게도 삼십대 중반인 나이에, 켄터키에서 어느 날 오전 금식 중, 성경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혀지는 최초의 체험을 한 후로, 그 전에 그토록 궁극적 진리의 실체를 찾아 외롭고 고단하게 분투하던 때에 몰두했던 종교철학 서적들의 그 장황하고 현학적인 활자들이 실은 활자가 아닌 죽은 문자라는 생각을 하게끔까지 되었다.

굳이 웨스트팔의 표현을 빌릴것도 없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최고의 존재자’나 ‘제일의 원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셨던 생명과 언약과 경배와 찬송의 신으로 충분히 계시되었다.

요즘 보니 아직 성경을 활자로 체험치 못한 이들은 구약의 율법, 계명, 즉 말씀을 마치 벌주길 좋아하는 심술궂은 신이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씌워 놓은 굴레인양 도그마적인 것으로만 오해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이런 경우 예수를 엉뚱하게 자신들의 몰이해의 대변인으로 내세우는 해프닝이 벌어지는 경우가 생기는데 물론 여기서 이들이 이해하는 예수는 십중팔구 구약 때부터 예언되어온 메시야가 아니다. 이들의 예수는 구약 율법의 급진적인 타도자로서 골동품 같은 구약의 하나님과 단절한 인본주의적 신약 질서의 혁명적 전사로 묘사된다.

최근 필자의 아들이 소속된 대학의 한 학생이 뉴스앤조이에 쓴 칼럼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린걸 옮겨본다.

“(예수는) 도덕의 당위성을 인간 스스로에게서 찾고자 한 일종의 인본주의자요 휴머니스트인 셈이다.”
“예수의 윤리는 인간에 대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도덕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문을 통해 도덕적 자율성과 주권성의 획득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예수와 공자의 가르침, 도덕의 당위성이 우리에게 있다. 인간 마음이 도덕적 실천의 근거라는 깨달음이 바로 그 길이며, 그 길을 통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다.”

물론 위 글을 쓴 이는 예수의 그리스도성-메시야적 신성을 믿지 않으므로 도올처럼 예수를 공자와 같은 반열에 놓고 있다.

필자가 소시적 버트란트 러셀, 샤르트르 등 그토록 매료되었던 ‘휴머니즘/휴머니스트’란 것이 나중에 미국 신학교에 와서 세계관을 알고보니 기독교적 유신론과 대척점에 있는 자연주의적 무신론의 일종이었을 뿐 아니라, 헤겔, 피히테, 셀링 등 튀빙겐 신학교 출신의 많은 출중한 관념론적 사상가들과 문인들이 범신론 계열이었던 것을 비로소 깨닫고 얼마나 필자의 인생에 반전적인 내적 평정과 영적 분별과 자유함을 만끽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전통적 크리스찬 유신론에서 도덕의 선험적 기원과 기준은 인간을 창조하신 영원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당연히 당위적이다. 이 도덕성이 가장 완전하게 계시된 것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희생적인 십자가의 죽음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무신론적인 자연주의자에게 인간은 “최고의 동물(supreme animal)”로서 인간의 인간을 위한 중요한 가치의 창조자로 본다. 도덕은 단지 인간의 영역이다. ‘인문주의자 선언문(Humanist Manifesto)’에 나오듯 도덕은 인간의 경험에서 형성된 것으로 자생적, 자율적, 자치적이고 상황적이므로 자연 도덕적 당위성엔 의문이 부여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는 바, 인간의 심중을 살피시는 전능자의 눈에 인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다 (옘17:9-10). 그런 인간에게 마땅히 행하고 지켜야할 도덕적인 근거가 되며 당위성을 부여하시는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반면, 휴머니즘에서 말하는 도덕적 자율성과 주권성이란 인간성에 대한 무한한 자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듣기엔 유쾌할지 모르지만 결국 도덕의 선험적 기준을 절대적인 실체에 두지 않는 인본주의는 상대주의로 이어진다.

도덕적 기준에 있어 저마다 상대적으로 다 옳다고 생각하니, 옳고 그름의 보편적이고 절대적 기준이 없게 되어 결국 도덕적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요즘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포함된 동성애 이슈에 대해 인간의 ‘보편적’ 인권 존중이란 표현이 많이 쓰이는데 그러면 이 ‘보편적’이란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보편성은 개체성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개체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개별적 존재라면, 보편적인 것은 각개체에 공통되는 특징을 기준해 어떤 한 부류 전체를 반영하는 이념적인 것이다. 영희와 철수(개체) 등이 모이면 인간 일반이나 인류(보편)가 되는 이치다.

이런 보편성에 실재성을 부여하면 보편 이념의 궁극적 외연은 우리 인간의 영혼과 정신이 추구하는 바 초자연적이고 영원한 완전한 절대자로 인식된다. 기독교에서의 하나님은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인 보편적 실재이다.

동성애가 포함된 포괄적 차별급지법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 법이 추구하는 보편적 인권 보호적인 요소에 유독 ‘동성애’라는 개별적이고 특별한 비보편적인 요소가 들어있기 떄문인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낙태 허용 문제는 보편적 인권에 정면 역행하는 사안이다.

개별성을 무시하고 보편성만을 강조하면 도그마적이 되기 쉽기에 기독교계에선 보편성을 살리면서 보편성에 역행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특별법 같은 개별적 차별급지법을 주창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아닌 물질을 세계의 근본으로 생각하는 휴머니즘에선 보편적 실재를 부인하게 되므로 실증적이나 자연 주관적이고 무원칙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인민의 자율규범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와 그 아류의 허상을 보라. 이들이 주장하는 정의나 평등은 결과적으로 도덕가치에 대한 근거가 부재한 개념적 고안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위 글쓴이가 하나님과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 정서와 관계의 세계, 즉 마음의 세계”와 무관하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잘못 된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체 내에 삼위의 관계적인 속성을 지니신 분으로서 우리 인간의 창조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스런 자녀로 창조하시어 우리와 아름다운 관계를 맺기 위함이셨다.

만약 위 글쓴이가 구약을 읽는 동안 성령의 터치를 받아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자비로우신 성품을 알고 이해하고 느끼고 깨달아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면 이런 오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 뿐임을 기억한다고 하신다. 바람이 지나면 없어져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 수 없는 풀과 들꽃 같은 것이 우리 인생이라고 측은해 하신다(시편103:13-15).

또 종일토록 하나님을 찾지않는 백성들에게 손을 내밀어 부르고 계시는, 자식을 긍휼히 여기는 아버지 처럼 애걸스런 사랑을 우리를 향해 품고 계신 창조주 이시다(사65:2). 그 하나님께서 마침내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구원의 주가 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종교철학적인 드라이한 느낌으로 하늘이나 하나님 또 말씀을 그저 법조문 정도로 인식해서는 곤란하다. 도덕성의 기준이 하나님이라는 의미는 냉혹한 감시자와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선사하시기 위해 눈물과 피와 땀과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신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를 함의한다.

크리스찬이 도덕적으로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혹자의 생각대로 주위 시선이나 타율적 규제 혹은 스스로에게 향한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 때문이다.

평생 자신을 위해 눈물과 땀의 갖은 고초와 희생을 다해오신 부모님의 피맺힌 사랑에 전율토록 가슴이 적셔진 자식은 비록 시행착오를 거듭하더라도 종래는 그 부모의 바램을 저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남의 시선이나 강제에 의한 것, 자기 양심의 차원을 넘어선 보은적 사랑의 자발적인 발로이며 이런 내적인 사랑의 에너지는 어떤 모습으로든 자연적으로 주위에 전해지고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크리스찬에게 하나님은 어느 의미에서나 어떤 경우에서나 결코 혹자가 생각하듯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음이 너무도 자명한 것은 하나님은 자체로서 우리의 존재적 생명과 삶의 궁극적 목적이 되시기 때문이다. 크리스찬에겐 매일 말씀을 살아내며 오로지 목표를 향해 부단히 달려가는 길만이 열려있을 뿐이다.

우리 믿는 자들은 부족하여도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우리 믿는 자들은 미치지 못하여도 우리는 완전한 본이 되시는 주님을 만난 최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다. 누구나 주님을 만나면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의 구현은 우리의 눈 높이에 맞춰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과 땅에서 이미 완성 되었다. 이 사랑은 세상의 어떤 지고지선의 보편적 도덕 법칙이나 미덕을 넘어서는 형언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우주적 울림이다.

최고의 세속적 인본주의자인 막스의 유물론에서 파생된 북한의 세습적 전체주의의 패륜적이고 몰인간적으로 야만적인 잔학상을 접하면서 우리는 실로 영적 각성을 새롭게 하고 무장하여야 한다.

이 재앙의 때에 북한의 동포들과 중국, 인도, 파키스탄, 베트남, 이디오피아 등 공산권과 이슬람권에서 핍박과 살상의 환난 가운데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해야 하겠다.

박현숙 목사(프린스턴미션, 인터넷 선교 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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