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대한 인식 없이 ‘이신칭의’ 이해 못해”

교회일반
인터뷰
노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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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로마서 강해’ 번역한 서문강 목사(上)
은평구 중심교회 원로 서문강 목사. ©노형구 기자

서문강 목사(중심교회 원로)는 20세기 마지막 청교도라 불리는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목사의 ‘로마서 강해’ 전 14권을 번역한 목회자이자 신학자다. 1976년부터 2005년까지 29년간 진행된 과업이었다. 그 때문일까. 서문강 목사의 얼굴에서 마틴 로이드 존스의 모습이 스쳐갔다. 그는 이외에도 아더 핑크의 ‘히브리서 강해’, 조나단 에드워즈의 ‘고린도전서 강해집’과 ‘신앙와 정서’, 찰스 스펄전의 ‘설교전집’, 존 플라벨의 ‘은혜의 방식’ 등 총 70여 권의 개혁주의 저서를 번역했다. 아래는 지난 22일 진행된 그와의 인터뷰 일문일답.

Q. 마틴 로이드 존스가 자신의 ‘로마서 강해’에서 로마서 3장을 1장보다 앞서 강해했다.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A. 마틴 로이드 존스가 로마서 강해를 시작한 것은 1955년부터다. 그런 뒤 1968년까지 13년 동안 강론했다. 크리스마스, 부활절은 빼고 다 강론한 것이다. 로마서 강해는 대략 350개가 넘는다. 그는 로마서 1장 1절부터 14장까지 강해했다. 왜 로마서 16장까지 못했냐면, 중간에 마틴 로이드 존스가 병이 났기 때문이다. 로마서 강해집은 먼저 로마서 3장 20절부터 4장 25절까지의 설교로 시작한다. 이 책을 내가 처음 한국교회에 소개했다. 1976년도에 번역했다. 총 14권 중 3권이 먼저 나온 것이다.

그가 1장이 아닌 3장부터 강해한 이유가 서문에 나온다. 복음의 심장인 ‘이신칭의’ 교리로 빨리 달려가고 싶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현대 그리스도인 곧 목말라하는 영혼들과 죄 가운데 있고 멸망으로 달려가는 이들에게 복음의 희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했다. 이신칭의 교리는 복음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Q. 마틴 로이드 존스 설교의 특징은 무엇인가?

A. 그분의 설교는 매우 강해(講解)적이다. 그 당시 상황 속에서 영적인 혼란을 겪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바로 세워주려고 애를 썼다. 존 칼빈(John Calvin) 목사도 당시 로마 가톨릭과의 영적 싸움에서 잘못된 복음을 인식한 사람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칼빈의 설교는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교리를 많이 지적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설교했을 때는 1·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이 때는 인본주의적 신학이 횡행했다. 불트만, 심지어 칼 바르트 등도 그랬다. 신정통주의자로 분류되는 칼 바르트는 기존 성경관과는 많이 다르다. 당시는 여러 가지 신학적 문제로 성도들이 많은 혼란을 겪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는 어거스틴, 종교개혁자, 청교도 설교자 등을 통해 견지해왔던 복음을 바로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분의 설교에는 보이지 않게 변증적인 요소가 많다. 이는 변증학적 의미의 변증은 아니다.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분이 적용이 없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 증거 속에는 복음이 말하는 바를 말하면서 현실 속에서 영적인 씨름을 하는 사람들에게 적용의 빛을 비춰주고 있다.

Q. 마틴 로이드 존스의 메시지에 비추어, 현재 한국교회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면?

A. 그가 강조했던 것은 사도의 복음이다. 1세기 사도의 복음은 현재도 동일한 유효성을 가지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온 세대를 막론하고 이를 계속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복음은 변한 적이 없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도 변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사람의 죄악은 여전하다. 그래서 복음도 여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 견지하던 복음에 대한 통찰력이나 시각이 현대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의 지원과 성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지금 한국교회는 교회 성장학적인 가치에 매몰돼 있다. 교회 성장론으로 따지자면 중세 교회가 가장 성공적이다. 중세교회는 세속권까지 장악하는 막강한 힘을 지녔었다. 우리는 중세교회를 큰 교회로 보지 않는다. 힘 있는 교회로도 보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에 언제부터인지 세속주의가 들어왔다. 교회 성장론과 연결돼 외형적인 집회수를 따졌다. 그렇다고 내가 소(小)교회주의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교회처럼 은혜로 한 번에 3천명씩 전도할 수 있다. 교회가 크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교회의 외적 성장으로 목회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이는 엄청난 잘못이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이 말하는 가치를 견지해야 한다. 내가 마틴 로이드 존스를 통해서 배웠던 것은 성경대로 가면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통계로 볼 때는 작을 수 있다. 그러나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영적 부흥을 굉장히 강조했다. 짧은 시간에 성령에 의해서 회심과 각성이 봇물처럼, 소나기처럼 터지는 것을 영적부흥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이런 날이 속히 오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Q. 한국교회의 영적부흥을 가로막는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A. 한국교회가 성경으로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환란의 바람이 불 것이다. 환란이라는 게 예전처럼 외적인 박해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세속주의 물결, 오늘날 같은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의 교회는 그 신성성(神聖性)을 잃어버릴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거기에 대한 의식을 성경이 말하는 대로 배워야 한다. 성령께서는 이를 통해서만 역사하신다. 그런데 인위적인 방법으로 하면 부흥은 일어나기 어렵다.

사도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하면서 두렵고 떨었다고 말했다. 왜 그가 두렵고 떨었는가? 자신의 힘으로는 사람들을 회심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이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목회의 성공을 마치 기업인이 매출액을 올리는 것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면 이는 엄청나게 무서운 현실이다.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교회사가 증거한다. 사도시대에 예루살렘교회는 처음에 3천명이 회심하고 모였다. 팽창하고 성장도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했다. 작은 교회, 가정교회, 어떤 소그룹 형태로 흩어지며 박해시대를 거쳤다. 눈에 보이는 세력이 약화됐던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 교회를 향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과 터’라고 말했다. 우리는 ‘기둥과 터’라고 말하면 우람하고 엄청난 교회당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전 초대교회는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성경은 그럼에도 이를 하나님의 거룩한 전, 성소라고 했다.

오늘날 작은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다. 우람하게 지으려고 한다. 현대적으로 인테리어를 잘해놓고 바라보기만 해도 거룩성을 느끼게 하면서 뭔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마치 성전의 원형으로 생각한다면 복음의 본질에서 많이 떠나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분쟁이 있는가? 또 교단 내에서도 얼마나 많은 분쟁이 있는가? 요새 변호사들이 교회 때문에 엄청난 수익을 낸다는 얘기도 있다. 성경대로 가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물론 우리가 연약하지만 그 연약함을 극복하는 힘과 은혜도 하나님이 주셨다. 이 기준만은 무너뜨리지 말아야 한다.

Q. 개혁주의 신학에서 ‘예정론’은 항상 민감한 주제였다. 어떻게 생각하나?

A.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복음 전도를 할 때 택함의 교리를 말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한 적이 없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말씀하셨다. 복음 전도 측면에서 예정 교리를 전면에 둘 필요가 없다. 누구에게든지 그리스도를 증거해서 믿도록 해야 한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만민에게 전하라고 했다.

그러나 누가 복음을 믿는가? 다 믿는가? 다 믿지 않는다. 더 똑똑한 사람, 더 지혜로운 사람이 믿는가? 아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영생하기로 작정된 사람은 다 믿는다고 대답한다. 에베소서 1장 3절 이하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중략)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나왔다.

이 택함의 진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이다. 이 비밀스런 진리를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셨다. 이를 누구에게 가르쳤는가?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여기서 위로를 받고 자기를 창세 전부터 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이 택함의 교리는 우리에게 굉장히 위로를 준다. 그러면서도 굉장한 경계심을 준다.

왜냐하면 택함의 교리가 마음대로 살라는, 아무렇게 해도 천국 간다는 보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삶의 목표와 소망을 견지하라고 주신 것이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순례길 속에서 정욕, 죄, 사단, 세상을 이기고 아버지의 집에까지 나아가기 위해 택함의 교리를 주셨다. 이렇게 사용해야지, 자신의 죄와 정욕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택함 교리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칼빈 목사는 처음부터 예정론을 시작하지 않았다. 성경을 연구한 끝에 ‘성경이 예정론을 말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각 교회를 세울 때 성도들을 양육하기 위해서 선택의 교리를 가르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는 이를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선택의 비밀을 주신 의도가 무엇인지 잘 가르쳐야 한다.

선택의 교리를 잘못 사용하게 되면 남을 판단하는 도구가 된다. ‘너는 선택을 받지 못해 믿음이 없다’는 식으로 판단하면 반감이 일어난다. 누가 선택받았는지는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예수를 진실로 믿는 사람을 보면 선택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선택에 대한 가장 확증적인 증거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다.

Q.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은 예정론을 불편하게 느낄 것 같다.

A. 이성주의적 관점에서 선택교리를 보면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았으므로 전도도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의 공평성을 무너뜨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의무가 없으시다. 죄인을 구원하시고 자비를 베푸실 의무가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따른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그리고 택하심의 발로다. 로마서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로마서9:16)라고 나왔다. 이를 기억해야 한다.

알미니안주의는 선택교리가 인간의 책임성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약화시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책임이 선택의 진리를 배우고 나서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았으니 얼마나 전인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하는가’라는 거룩한 동기를 제공한다. 선택 교리는 이럴 때만 사용해야 한다. 복음의 완전성과 하나님 주권성이 잘 조화된 것이다. 우리가 연약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구원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이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된다고 남용하는 가르침은 아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참된 믿음을 가진 후에도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치는 무섭게 나타난다.

Q. 알미니안주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A.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만 강조하면 인간의 책임성을 약화시키는 게 아니냐’는 데서 나왔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인간의 책임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에 대한 책임성을 언제나 견지했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를 행할 능력이 없다. 인간의 책임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따라서 가야할 당위성을 강조한 것이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책임성을 무력화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는 칼빈주의를 표현할 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동시에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전인적인 헌신’이다. 칼빈주의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자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전인적인 헌신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라고 했다. 그리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1)고 했다. 그래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인 것이다. 이것이 책임성이다. 은혜를 바르게 강조하면 사람이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전인적인 헌신을 드리는 동기로 작용한다.

이성주의적인 측면에서 보면 알미니안주의가 옳아 보인다. 그러나 인간 이해의 척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려고 하면 안 된다. 알미니안주의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는 명분도 결국 이성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 측면에서 나왔다. 그러면 칼빈주의는 합리적이지 않은가? 아니다. 성경처럼 논리적인 게 없다. 성경은 인간의 논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논리다. 범죄한 인간의 논리와 하나님의 논리는 같을 수 없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6)라고 했다.

칼빈주의를 바르게 이해하면 방종하면서 살 수 없다. 무책임하게 은혜로만 되니까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고 하는 말은 은혜 밖에서 사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면 그렇게 살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칭의를 바르게 가르쳐야한다. 그러면 내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이 안든다.

Q. 한국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값싼 은혜로 변질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A. 거듭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거룩성과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한 바른 인식 없이는 칭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 복음의 이치에 접근하지 못한다. 이신칭의는 전제가 둘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온전히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그런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부패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을 위해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보내주셨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값없이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만으로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진수다. 자신이 완전한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겠나?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이신칭의를 휴머니즘으로 접근하면 반드시 ‘아무렇게 살아도 구원 받는 것 아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너무 은혜를 강조하면 ‘그리스도인이 윤리가 실종이 되고 교회에서 방종을 부추기는 것 아닌가’란 말이 나온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거듭난 사람에게는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 안에 성령이 계시는데 어떻게 마음대로 살겠는가? 교회에서 이신칭의 교리를 기도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바르게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루터에게 이신칭의 교리를 깨닫게 해주셨다. 그 전에 루터는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빛이 들어왔을 때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 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을 때 루터는 완전히 새사람이 됐다. 그러니까 ‘교회가 이신칭의 교리를 너무 가르쳐서 윤리적·도덕적 실천을 없앴다’고 말하는 논리는 휴머니즘적 종교적 접근에서 나온 것이다. 정작 그 은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방종의 삶을 살 수 없다.

거듭난 사람이 성령을 모시고 사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의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 종교개혁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한 번 보기를 바란다. 그들에게 윤리가 실종됐었나? 영국 청교도 시대 어느 감옥에 백기가 있었다고 한다. 죄수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술집이 문을 닫았다. 이 때가 영구에서 복음이 가장 왕성하게 역사한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영적인 것과 상관없는 나라가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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