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행함’과 야고보의 ‘행함’

오피니언·칼럼
칼럼
신성욱 교수

[1] ‘모순’(矛盾)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유래가 된 것이다. 초나라에 무기를 파는 상인이 있었다. 그 상인은 자신의 창을 들어 보이며 그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이라고 선전했고, 또 자신의 방패를 들어 보이며 그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라고 선전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명나라 왕의 신하 중 한 사람이 “당신이 그 어떤 방패도 다 뚫을 수 있다고 선전하는 창으로 그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다고 선전하는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됩니까?”하고 상인에게 질문을 던지자 상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모순이란 단어가 나왔다.

[2] 성경에 모순되어 보이는 구절들이 적지 않다. 때문에 성경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적잖은 혼돈을 가져다준다. 이것들을 잘 정리해주면 좋겠는데 명쾌한 설명이 많지 않으니 독자들이 성경 읽기에 부담을 갖게 된다. 오늘은 성경의 내용들 가운데 모순되어 보이는 이슈들 중 가장 독자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준 한 가지 주제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바울은 롬 4: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그런가 하면 야고보는 약 2:21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두 사람의 얘기를 보면 완벽한 모순이다. 바울이 행위로써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면,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누가 봐도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말이 틀려야지 둘 다 맞을 수는 없는 내용이 틀림없다. 이럴 때 독자들은 절망을 경험한다.

[4] 이제부터 이 어렵고 복잡한 실타래를 하나씩 벗겨보자. 우선 바울과 야고보 두 사람의 문제는 그들이 편지를 보내는 수신자가 누구인가를 참조해야 오해가 없다. 바울은 ‘새신자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소수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로마서를 기록한 반면, 야고보는 ‘외모로 성도들을 대하면서 차별하거나 행함이 아닌 말로만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기존 성도들’을 대상으로 야고보서를 기록했다. 서로 다른 정반대의 대상들을 상대로 기록했기에 두 사람의 강조점 역시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5] 다음으로는 ‘믿음의 정의’의 문제에서 두 사람의 내용을 구분해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사용한 ‘믿음’이란 단어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란 개념인 반면, 야고보가 야고보서에서 사용한 ‘믿음’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뢰’란 개념으로 서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문맥과 신학의 문제로 따져봐야 한다. 이 부분은 제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되겠다.

[6] ‘행위’ 또는 ‘행함’'이란 단어에 서로 상반된 개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행위(행함)’는 바울이 부정적으로 비판했다.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이다. 그때의 ‘행위’(행함)는 ‘율법의 행위’(행함)를 말한다. 율법이 기초가 되어 개인의 자랑거리가 되는 행위 말이다. 그런가 하면 긍정적 의미의 ‘행위’(행함)가 있다. 이것은 ‘구원받은 자에게서 반드시 나타나야 할 행위’(행함)를 뜻한다. 이때 이 단어를 ‘율법의 행위’(행함)와 구분해서 ‘믿음의 행위’(행함)라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이 기초가 되어 나타나는 자발적인 행위(행함)를 뜻하는 것이다. 이건 개인의 자랑거리로서의 행함이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써 주어지는 신뢰에서 나오는 행함이므로 내게 자랑할 여지가 전혀 없다.

[7] 자 그럼 지금까지의 선지식을 가지고 처음 바울의 얘기와 야고보의 얘기를 다시 살펴보자. “만일 아브라함이 (율법의)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

쉽게 이해하도록 몇 마디를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만일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킨)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롬 4:2).

지당한 말씀이다. 율법의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선한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겐 자랑거리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8] 그런가 하면 야고보의 얘기를 들어보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믿음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한 마디를 첨가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기초되어 믿음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열매 맺는)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개인이 행한 선행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개인의 절대적 신뢰와 의존을 통하여 나타나는 행위는 있어야 의인으로 카운트 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9] 신뢰와 의존은 개인의 선행으로 카운트 될 수 없기에 바울이 말한 롬 4:2의 말씀을 뒤엎는 모순이 결코 아님을 놓치지 말라. 다시 설명하자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친 스스로의 선행으로 의롭다 함을 간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신 강력한 신뢰(믿음)와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신뢰요 행함이기 때문에 아브라함 편에서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 신뢰에는 자신의 능력이나 선함이 절대 개입될 수 없다. 신뢰의 대상을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공로가 있다면 내개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야고보의 논지는, 의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분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행함으로 나아가야 마땅하지 않느냐란 것이다. 말로만의 섬김이나 사랑이 아니라 행함으로 열매 맺는 삶이 있어야 한단 말이다.

[10] 이제 정리해보자. 바울이 비판한 행위가 자신의 선함을 자랑하는 수단이라면 야고보가 강조한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주어지는 신뢰를 통해 드러나는 행위란 면에서 차이가 있다. 이런 설명 없이 처음 대했던 바울의 말(롬 4:2)과 야고보의 말(약 2:21)은 모순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바울과 야고보 두 사람의 얘기는 서로 모순이나 충돌되지 않고 도리어 진리의 하모니를 이루는 환상의 듀엣이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그분이 바라시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보면 좋겠다.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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