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칼럼] 몸, 여성,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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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최유진 목사(숭실대 겸임교수)

"그의 몸이 생겨날 때 나는 게울 것 같은 이물감을 가졌고, 점점 부풀어 심장까지 차오르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죽을 힘을 다해 내 몸으로부터 떼어냈다. 내 몸의 진액을 짜내어도 짜내어도 고 작은 것은 허기져했고, 날마다 포동포동 살이 찌는 내 새끼를 내 손으로 씻기면서 날로 굳세고 아름다워지는 몸을 보면서 느낀 사랑의 기쁨을 무엇에 비길까." (박완서, 『두부』 중에서)

내 한 몸의 안위와 소시민적 신앙에서 벗어나 통일과 평화라는 거대담론에 발을 내디딘 것은 아이를 낳고 나서다. 물론 그전에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던 주제였다. 그러나 몸이, 가슴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은 단연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다. 갓난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며, 아이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면서 이 여린 몸이 폭력적으로 찢기고, 잔혹하게 부서지는 장면들이 겹쳐졌다. 내 아이가 생존하려면 평화로운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돌봄 노동에 동원되었다. 돌봄 노동이란 출산과 수유부터 먹거리 생산과 그 준비, 어머니 노릇, 가사노동, 간병, 아이들 가르치기, 노인과 병자 돌보기 등을 말한다. 모두 몸으로 하는 몸을 다루는 노동이다. 이성적 사유가 아니라 몸과 돌봄의 관점에서 저술한 『모성적 사유』의 작가 세라 러딕은 그렇기 때문에 여성은 인간의 몸에 대해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성은 인간 몸의 역사를 알고 있고, 그 희생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몸에 기초한 사유는 몸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전쟁과 대척점에 서있는, 평화를 만드는 사유이다. 전쟁과 분단으로 점철된 70여년의 한반도의 역사는 폭력을 내면화시키고, 영속화시키는 구조를 만들어 왔다. 따라서 한반도에 비폭력, 평화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몸과 여성의 관점이 매우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몸으로 하는 노동으로 체득된 평화를 연습하는 방법 몇 가지를 제안하려고 한다.

우선 자녀들에게 체벌하지 않는 것이다. 폭력은 모방하기 쉽고, 더 큰 폭력을 낳는다. 아이가 18개월 지나서 '자아'가 생기면서 열통 터지는 일이 많았다. 한두 번 엉덩이를 때리다가 그 강도가 더 세지는 것을 경험한 후, 어느 순간 훈육과 폭력은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체벌을 그쳤다. 부모가 강압과 폭력이 아닌 대화와 설득을 선택한다면 그 아이는 다른 아이에게 비폭력적으로 대화와 설득을 행사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서로의 몸을 보호하는 좋은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무기를 본 뜬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의 몸을 아프게 하는 일을 연습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얼마 전 아들아이의 친구 귀에 장난감 비비탄 총알이 들어가 응급실에 간 사건이 있었다. 총기류 장난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물론 아이는 여전히 총을 사달라고 하지만 언젠가는 부모가 금지하는 이유를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자녀들이 가정에서 식물이든 동물이든 생명체를 돌보게 하는 것이다. 생명을 돌보고 기르는 사람만이 폭력에 예민해지고 약한 것을 보호하는 심성을 기르게 된다. 아이는 매일아침 물고기 먹이를 주면서 "많이 먹고 잘 자라라."라고 말한다. 자신이 아닌 남을 염려하고 돌보는 것만큼 평화를 연습하는 길은 없다.

국가권력이 자행한 폭력에 희생된 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안타깝게 목도하며 다시 한 번 평화연습을 다짐해 본다. 주의 큰 팔에 안기시기를.

/글·사진=평통기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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