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훈 에세이] 징비록의 유성룡 대감은 바둑도 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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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규 기자
veritas@cdaily.co.kr

[기독일보 강정훈 교수] 금년에는 늦은 저녁 광복 70주년 기념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懲毖錄)’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는데 얼마 전 종영되었다. 노량해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이순신(김석훈 役) 장군의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이 아직도 귓가에 메아리치고 있다.

▲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포스터 ©KBS

'징비록'은 임진왜란 전후 조선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안동 하회가 고향으로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 확충에 노력한 명재상이다.

징비록은 지난해 사극 신드롬을 일으켰던 '정도전'과 더불어 오래 기억될 역사드라마였다. 경상도 봉화 출신의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기본 틀을 설계한 우리 역사 상 불세출의 영웅이요 사상가이다.

조선의 임금은 절대군주가 아니라 <선비 중의 수장>으로 자리매김하여 임금도 신하로부터 강의를 꼬박꼬박 들어야 하고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도 하나하나 챙겨보아야 했다.

덕분에 500년 왕조실록과 왕과 왕비의 무덤이 고스란히 남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제된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단한 역사를 가진 우리가 되었다.

▲안동시 풍천면에 있는 서애(西厓) 유성룡이 세운 옥연정사(玉淵精舍)의 건물 중 하나인 ‘원락재(遠樂齋)’ ©옥연정사

지난 달 고향에 성묘를 갔다가 3년간 동문수학한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러 안동에 갔다. 모처럼 간 김에 유성룡(柳成龍) 대감의 고택을 방문하였다. 낙동강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하회마을에는 부용대(芙蓉臺) 기슭에 유성룡이 세운 옥연정사가 남아있다.

문간채·바깥채·안채·별당까지 두루 갖추고 있으며, 강물이 마을을 시계 방향으로 휘감아 돌다가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옥소(玉沼)의 남쪽에 있다. 소의 맑고 푸른 물빛을 따서 옥연정사라고 부른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이 전쟁이 끝난 뒤, 뒷날을 경계하고자 하는 뜻에서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까지의 일을 직접 기록한 고색창연한 징비록(懲毖錄)의 역사 현장이다. 이 책에는 전쟁 전(前) 일본과의 관계, 전쟁 발발과 진행 상황, 정유재란 등의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저자 자신이 쓴 『징비록』의 서문에 “매번 지난 난중(亂中)의 일을 생각하면 황송스러움과 부끄러움에 몸 둘 곳을 알지 못해왔다. 그래서 한가로운 가운데 듣고 본 바를 대략 서술했으니, 임진년(1592)에서 무술년(1598)까지의 것으로 모두 약간의 분량이다”고 적고 있다. 노재상의 겸허한 풍모가 전해진다.

▲안동 병산서원 전경

하회마을을 나오다가 오른편 먼지 나는 길을 따라가면 병산서원이 있다. 병산서원은 유성룡이 죽은 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위패가 모셔진 하회 유 씨네 서원이다.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최고의 멋과 운치가 담긴 고건물로 추천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특히 서원 입구에 있는 만대루에 앉아 바라보는 정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휘돌아가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위치한 병산(甁山)을 바라보노라면 이승인지 저승인지 넋을 잃기에 안성맞춤인 마루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의 유성룡은 우매한 선조 임금의 재상이라기보다는 불쌍한 백성을 돌보는 어버이 같은 목민관이었다. 오래전에 읽은 삼중당(1975) 간행의 징비록이나 금년에 방영한 드라마를 보면 유성룡은 전술 전략이나 전쟁지원, 의병이나 백성을 위로하고 민심을 다독이는데 천부적인 자질을 보인다.

한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뛰어난 자질을 겸비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하나의 작은 실마리를 발견했다.

유성룡 대감은 관직에서 철두철미했을 뿐만 아니라 바둑에서도 고수라는 점이다. 조선 후기에 이희준(李羲準)이 편찬한 문헌설화집인 계서야담(溪西野譚)에는 유성룡과 바둑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한국현대바둑 70주년 기념대국 '전설의 귀환' - 지난 6월 26일 열린 조훈현과 조치훈의 바둑 대국 장면.

유성룡에게는 콩과 보리를 가려 볼 줄 모를 정도의 바보 같은 숙부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숙부가 유성룡에게 바둑을 한 판 두자고 했단다.

유성룡은 실제로 당대 조선의 국수라 할 만한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이없는 말이었지만 숙부의 말씀이라 거절하지 못하고 바둑을 두기 시작하였다. 막상 바둑이 시작되자 유성룡은 숙부에게 초반부터 몰리기 시작하여 한쪽 귀를 겨우 살렸을 뿐 나머지는 몰살당하는 참패를 했다.

바보 숙부는 대승을 거둔 뒤 껄껄 웃으며 "그래도 재주가 대단하네. 조선 팔도가 다 짓밟히지는 않으니 다시 일으킬 수 있겠구나"라고 말했다.

이에 유성룡은 숙부가 거짓 바보 행세를 해 왔을 뿐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의관을 바로하고 절을 올리고는 무엇이든지 가르치면 그 말에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숙부는 아무 날 한 중이 찾아와 하룻밤 자고 가자고 할 것인데 재우지 말고 자기한테로 보내라고 했다. 실제 그 날 한 중이 와서 재워주기를 청하자 유성룡은 그를 숙부에게 보냈는데 숙부는 중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네 본색을 말하라고 해 그가 풍신수길(豐臣秀吉·토요토미 히데요시)이 조선을 치러 나오기 전에 유성룡을 죽이려고 보낸 자객이라는 자복을 받았다고 한다.

바둑은 논리 정연한 두뇌 스포츠로서 요즈음 한중일 3국의 프로바둑 열기가 대한하다.

“바둑은 인문학과 수학이 녹아있고 문리(文理)가 융합된 지구상에서 가장 지적인 게임이다. 사유의 힘을 키워 주기 때문에 취미활동을 넘어서 교육적 요소가 풍부한 콘텐트이다” (대한바둑협회 홍석현 회장 인사말에서)

필자는 명색이 한국기원 공인 아마 5단으로 지난 7월, 한일 양국의 바둑 거장 조훈현 9단과 조치훈 9단의 <전설의 귀환> 대국을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꼼짝 않고 지켜보기도 했다. 더러는 단양 금수산 자락에 낙향하여 혼자 사는 친구와 수담으로 밤을 지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젊은 프로기사를 후원하는 소루회 모임에서는 12살 초단에게 4점을 접고도 숙부 앞에 선 유성룡처럼 땀을 빼며 몰리기만 한다.

서애 유성룡 대감은 조선사회에서 선비들이 대화하고 소통하던 수담(手談)인 바둑을 통해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을 가다듬어 난세를 살아가며 백성을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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