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규 목사 설교] 해방된 인간

목회·신학
목회
장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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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회 이선규 목사 / 롬 8:1~9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선규 목사ㅣ금천교회

 

사람의 생애에는 두 가지 출발점으로 부터 시작 됩니다.

하나는 그의 태어난 날이요, 다른 하나는 그가 이 땅에 태어난 삶의 이유를 아는 날입니다. 이 두 가지가 분명할 때 그 사람의 삶은 역사적인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눅 2:41~51]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혈육의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있어 야 할 존재임을 말씀 하셨습니다.

“어찌 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참 믿음은 두 가지 단계를 거쳐 성립이 됩니다.

하나는 회개의 단계요, 그 다음이 신앙의 단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선교의 첫 설교에서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 왔으니 그러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 적으로 요청 되어 지는 것은 과거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 할 것이 없는 의인 아혼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 보다 더 하느니라.”(눅15:7)고 하였습니다.

회개란 무엇 입니까? 회개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지나치리만큼 자기 자신에게 집착 합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삶의 스타일을 만들게 합니다. 회개란 이런 스타일을 벗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그 만큼 흥미를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학벌, 문벌, 사회적 신분, 심지어 자신의 인격성마저도 분토와 같이 여겼습니다. 회개는 세상 생활에서 호적이 떨어지는 것을 의미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보니 세상의 모든 것이 시시해 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마난 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바꾸어 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을 찾아 돌아오지 않는 회개는 도덕적인 가치는 부여 될 수 있지만 종교적 가치, 다시 말하면 구원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회개 ‘메타 노이아’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죄인은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체험을 했던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저 버림은 쓰러지는 것입니다.
당신께 향하는 것은 일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을 떠나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당신께 돌아가는 것은 새롭게 깨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속박으로 부터 자유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는 해방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해방은 자유를 의미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 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까? .

첫째로 죄와 죽음으로 부터 해방 하였습니다. 2절, ‘죄와 사망으로 부터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죄 값으로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죄를 없이 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천성 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아무리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고 이래서는 안 되지 하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만 행하는 결과만 낳게 됩니다. (8)이와 같은 인간의 숙명적 갈등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신 성령의 법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사형을 선고하기 때문에 그것은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법은 죄와 죽음의 법인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 시켜 주시기 때문에 그것은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우리 에게는 정죄함이 없어 졌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데 누가 감히 정죄 할 수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죄와 죽음에서 나를 해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법으로 내가 자유를 얻고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였고 6절에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이니라’고 하였고 7절에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하였고 ‘너희가 육신 그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 사람은 두 종류의 삶의 스타일이 있는데 그 생활의 차이는 마치 남행 열차와 북행 열차의 간격이 멀어져 가듯 영과 육의 생활의 거리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생각을 알게 혹은 모르게 회피하고 있습니다. 왜 십일조는 못 하는가 성령은 하라고 하나 육의 생각이 막아 버립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종이 나아만의 옷 두벌을 취했다가 문둥병이 들었고 아간은 이스라엘이 아이성을 함락 했을 때 전리품을 넘보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것을 취했다가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엘리야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살았습니다.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 굶어 죽지 않았고 베드로와 요한이 금과 은은 없어도 헐벗거나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 이것은 하나님께 굴 복지 아니한 연고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중심인고로 어찌 하면 내 육신에 만족이 올 것인가? 내 육의 소욕을 채울 것인가? 하는 생각의 지배아래 있으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생각은 그 생각 속에 머무를 여지가 없습니다.

신하가 자기를 희생해 가면서도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 이지만 반대로 자기 지위 명예만을 보 존 하려는 자는 결국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나 육의 소욕을 따라 살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두 남자를 섬길 수 없음 같이 우리가 육신도 만족케 하고 하나님도 만족케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를 어디에 둡니까? 그리스도 안에 참 신자는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서 구별이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교리적인 측면에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 믿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누릴 영광이 무엇 이라고 했습니까?

1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정죄함이 없다‘는 헬라어 ‘카타 크리마’에서 온 말인데, 낱말의 뜻은 재판장이 무죄를 선언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준엄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무죄라고 선언 했으니 이 세상 그 누구도 우리를 정 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과거에는 죄악과 죽음의 캄캄한 밤중에 신음 하였으나 이제는 광명한 생명의 새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렇게 죄에서 해방 받은 성도가 구체적으로 누릴 은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후사가 됩니다.
롬 8:17에 ‘하나님의 후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이고 하나님 나라를 계승할 주인공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거주하면서 영원히 그 영광을 누릴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것은 인간을 그 죄로부터 해방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눅1:21)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 시었습니다. 진리의 왕이 불의한 권세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으시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부활하심으로서 정복 되었습니다.

진리는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유명한 과학자였던 노벨은 젊은 시절에 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진리가 불의에 의해서 시달림을 받는다’는 사실 이었습니다.

선한 자는 힘이 없어 늘 눈물만 흘립니다. 강한 자는 선이 결핍되어 그 눈물조차 없습니다. 어진 자는 사랑이 결여되고 온순한 자는 슬기가 없다 이리하여 가장 좋은 것이 갈피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의 말을 들어 봅시다.
이 땅에 마귀 들 끌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가 이기리로다. 진리는 하나님 나라로 가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의뜻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저주스런 비천한 종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영광된 신분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임재 하게 되므로 그 사람은 이미 육신에 잊지 아니하고 영에 있게 됩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매우 착한 성품 이어서 아버지 곁에서 조용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대단한 개성을 지녀서 아버지를 떠나 독립 하였습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 주관대로 살다가 참담한 실패를 경험 하였습니다.

돈도 떨어지고 친구와 애인도 떠나 버렸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아버지의 아들이‘라 자부 할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참회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은 겨우 품꾼에 지나지 않음을 발견했습니다.

“아들이라 마옵시고 품 군중의 하나로 여기시옵소서.”
둘째 아들의 이러한 참상을 본 아버지는 ‘이는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라 하여 큰 잔치를 베풀어 영접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로 재창조되는 순간 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새 옷을 입고 가락지를 낀 사람은 그 큰 놀라운 은총에 보답 하는 헌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후사라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로마서 8장 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는 것은 영광과 함께 고난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생각 컨 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 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 안에 거하는 자가 누릴 참 자유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 말씀에 거하고 진리 안에 거하면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물은 만인의 생명수입니다. 그러나 목이 타는 갈증을 절실하게 느껴 보지 못한 사람은 물의 풍요한 맛을 알지 못합니다.

빛이 있으되 보지 못하고 길이 있으되 찾지 못하는 한 인생은 영원히 허무와 좌절의 가시밭길 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도 북극성은 반짝이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그 별을 찾는 자는 자신이 가야하는 방향을 설정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그 별을 찾느냐 아니면 그 찾는 수고를 포기하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문밖에서 주님은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회개의 문을 활짝 열고 그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 안에서 주시는 참 자유의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로 자유하게 하셨으니 이제는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마라”

#이선규목사 #이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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