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목회·신학
편집부 기자
김병삼 목사의 고린도전서 강해(1)ㅣ고린도전서 1장 1절~3절
▲김병삼 목사   ©만나교회

◆ 불행하게도...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들고 들어갔을 때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꾸기보다는, 자신들이 살던 세상의 방식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는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을 머물며 복음을 전한 곳입니다. 불행하게도 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들리는 소식은 고린도 교회의 사정이 나빠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고린도교회에서 이렇게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아마 우리가 계속해서 배우게 될 내용이지만, 변질된 복음의 문제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마음이 아닌, 세상의 지혜와 세상의 방법으로 살아가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을 믿지만, 세상의 논리가 들어와 날카롭게 대립하게 된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무엇이 진리인지를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던 때, 한참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홍혜선 전도사라는 사람이 종북주의자들은 예수를 믿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한국의 모든 언론은 돈에 매수되어 종북주의자들이 되었고, 12월에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렇게 반복되어 학습되었음에도 사람들이 미혹된다는 것입니다. 12월 초에는 한국을 떠나면서 마지막 예언이라고 하는데, 방언을 하고 통변을 하며 마치 주님께 들은 말을 전하는 것처럼 꾸미지만, 무당이 굿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영상에서는, 별로 돈도 많지 않은 사람이 천만 원을 보내왔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니 어린아이들을 피신시키라고 말이죠. 그런데 기껏해야 그 돈으로는 10명 안쪽의 아이들 밖에는 피신시키지 못하는데. 그 말은 또 묘하게 누군가에게 돈을 요구하는 투로 들리기도 합니다.

참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세상의 방법이 들어오면 교묘하게 인간을 타락시키고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며, 결국은 돈, 성, 명예의 문제가 연결됩니다.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핵심이고, 인간은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는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이러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미련하게 들리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겉으로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복음의 진리를 벗어난 일들에 대하여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믿음 위에서 행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상의 지혜를 교회로 끌고 들어오므로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지혜가 들어옴으로 인해 논쟁적이 되어 버렸고, 시기와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논리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믿음 위에서 세워지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를 오늘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하는 이유 역시,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사라져 버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 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날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사람들이 드러나려고 하면서 서로 싸우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이 욕을 먹는 것'보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과 사상, 그리고 사람이 욕을 먹는 것을 더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사도 바울에게는 아마 가장 심각하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전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것보다 사도 바울을 따르려는 사람들 때문에 말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교회 안에 십자가도 사라지고 하나님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 아닐까요?

이러한 잘못된 신앙의 행태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놀라운 은사들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고, 은사에 집중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신유의 은사를 주신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함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은사에 집중합니다. 지난주 국민일보에 이런 광고가 났습니다.

"집회 참석해서 기도 받고 나은 사람들의 리스트가 죽 등장합니다. 마치 부적이 효험 있다고 광고하는 스님들의 이야기, 점이 용하다고 선전하는 무당들의 이야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심은 하나님을 따르도록 하심인데, 언제부터인가 물질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주님을 붙드는 대신 주님께서 주신 선물인 은사와 축복에 집착하면서 또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초대교회에는 하나의 커다란 오류가 있었던 듯합니다. 그것은 복음이 전해졌음에도 세상의 논리를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자의 윤리적인 삶의 문제는 '오직', 혹은 '절대'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윤리적 문제는 '비율법적'이고 '비형식적'입니다. 종교의식이나 전통의 문제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므로 만들어졌던 우리의 모습이 어느덧 의식과 제사로 변질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불행하게 굳어져 가는 의식적 종교에 대하여 끊임없이 깨어 있어야 할 것을 지적합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에게 신앙이란 하나님과 우리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신앙과 모범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인격적 관계'를 우선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배우게 될 것이지만, 예를 들어서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에 대하여도, 어떤 사람은 먹을 수도, 어떤 사람은 먹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애매함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신앙의 관계적 차원에서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하지는 않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종교주의자들'이 되면 '할 수 있나? 없나?'가 기준이 되지만, 하나님 앞에 올바를 신앙인이 되면,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유익한가? 유익하지 않은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이러한 사람을 향하여 우리는 '성숙함'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경계하는 것은, 불행하게도, 유아적 사고에 머무는 신앙인과 완고하게 변해버린 신앙인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가변적 문제를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지 마라!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일 수 없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목회적 신념이 아니었을까요?

◆ "편지" = 앞으로 우리가 함께 묵상하며 연구하게 될 고린도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배경을 아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보면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유독 실패한 곳이 있는데 '아덴'에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덴은 헬라 문학과 철학의 본산지였고, 그곳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철학적 지식을 가지고 변론하며 이방인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거기에서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복음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전하지 않고 철학적 논쟁을 통해 이기려고 하다가 겪게 된 일이지요.

그 실패를 경험한 후 사도 바울은 약간은 의기소침한 채로 고린도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1년 6개월을 머무는 동안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절에 보면,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라고 되어 있지요.

그곳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간증과 함께 전하게 되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떠나고 난 후에 고린도 교회는 내부적인 갈등을 겪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사도 바울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했고, 잘못된 이들을 질책하기보다는 격려하며, 초대 교회에 있었던 문제들을 정확하게 짚어 나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린도 전서를 공부하면서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아주 명백하게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case study'와 같은 방법으로 말입니다.

서론은 여기까지 하고, 이 글이 편지이기에 헬라의 풍습에 따라 먼저 발신자와 수신자가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1절에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이 부분은 사도 바울이 끝까지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음을 보게 되지요.

그에게 '사도성'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의 신분을 보장받지 않으면 안 되었죠. 게다가 그는 스데반을 죽일 때 현장에 있었던 자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하나님은 만난 경험이 있던 사람이라 그가 옛 생활에서 회심한 일은 끝까지 그의 이력에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사도성' 즉 신분의 보장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신분보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이든지 들어서 쓰실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사람을 쓰시기 위해서는 훈련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메섹에 있었던 제자 중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의 먼눈을 고쳐주게 하십니다(행9장). 하지만 아무도 사도 바울의 회심을 믿지 않으려고 할 때, 바나바가 사울을 예루살렘에 데려가 소개해 줍니다. 그리고 이후에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서 사역을 하다 사도행전 13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파송을 받고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이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이 은혜를 받았다고 금방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오랜 검증의 시간과 좋은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으면서 그가 사도성을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그의 과거 전력이 늘 따라다녔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순전성'을 가지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과거의 문제로 우리를 사용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한 우리가 쓰임 받기 위해 깨끗함을 유지하고, 우리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는 삶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한, 이 '편지'에서 중요한 것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2절)에 보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교회론'이 아주 중요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교회입니까?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는 모든 사람의 공동체"입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을 생각했을 때는 어떤 지파적인, 교리적인 개체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큰 교회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떤 교리에 충실하느냐"가 기준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거룩해져야 하는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아무리 교리 공부를 열심히 하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즉, '성도'라 불림을 받지 못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구약부터 신약에 이르는 아주 중요한 성경의 맥이 '거룩'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명령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신약시대에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너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산제사는 우리의 삶에서 투쟁하며 복음을 지키고,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전통 중에 영지주의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오리겐이라는 사람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자였기 때문에 스스로 거세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 전 어떤 목사님과의 만남에서 깜짝 놀란 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왔던 그 목사님도 개척 교회를 시작하면 스스로 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흥의 축복을 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잃은 것이 너무 많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한국 교회의 한 어른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목회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 것이 귀한 일이지만, 매일 매일의 삶에서 욕망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고 묵상하고 살아가는 것은 더욱 귀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여러분의 못된 습관을 끊지 못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간증을 참 많이 듣지 않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담배 냄새도 싫어지고, 술도 들어가기만 해도 토해 버리게 되어 끊었다는 말들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이고 은혜입니다. 하지만 매일 매일의 삶에서 자신의 욕망을 이기고 살아가는 사람은 더 큰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매일매일 우리가 거룩하게 구별되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가끔 교인들에게 도전을 주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장면을 시킬 때도 거룩하게 구별된 크리스천이 될 수 있고, 백화점에서 쇼핑할 때도 크리스천임이 드러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신분을 밝히고, 신분에 걸맞은 행동을 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구별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이 구별의 원리가 "매일매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주시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 주변에는 특권과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부담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장로와 권사로 피택이 되면서 헌금을 합니다. 물론 이 헌금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목회 초년병 시절에 어떻게 직분을 받으면서 헌금을 하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를 하면 할수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직분을 받고 헌금을 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는 신앙과 그것을 부담으로 생각하는 신앙이 있구나. 직분을 받으며 헌금하는 것이 돈으로 타락해 간다는 생각도 하고, 감사의 표현이 될 수도 있구나!'

사실 무엇이 옳으냐에 대한 기준은 '그 사실'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변질되어 버린 이유와 목적이 아닐까요? 우리의 삶에서 치열하게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었는데, 자기를 부인하는 금욕적인 행위를 신앙으로 생각하며 율법적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책임을 지지 않는 권한은, 책임을 지지 않는 헌신은 없습니다. 단지 거기에 기쁨과 은혜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 "관계" = 말씀을 묵상하다가 또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통해 사도 바울이 목자로서 교인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즉, '부르심'을 언급하고 있으며, 고린도의 교회를 가리켜서 역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도 바울의 신학이 나옵니다.

'은혜'의 관점이 없다면 그 어떤 관계도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이 행위입니다. 사실 사울이었던 바울이 부르심을 입은 사건은 자신의 의지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사도 바울을 부르셨던 것이지요.

즉 사신의 사도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을 분명히 합니다.

'사도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저도 개인적인 고백을 한다면, 제 삶의 모든 부분에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이요 저를 목회자로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서 목회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부르심의 은혜가 없었을 때는 자발적이지 못했습니다. 기쁨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부르심의 은혜를 고백하는 순간부터 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저에게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카리스마'입니다.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에게 목회자로서의 권위를 주신 것입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목회하면서 저보다 많이 배우고 많은 경험을 가진 분들에게 목회적인 조언을 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으로 좌우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큰 부르심의 사건 중 하나가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는 갈대아 우르 즉 이방신을 섬기는 나라에서 살고 있었고 그런 풍습에 젖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하나님이 부르셔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열국의 아버지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부르셨을 때,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여 죽이려고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울을 바울로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던 때, 저는 목사이면서도 목사 같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옛 생활을 끊지 못하고 노는 일, 도박하는 일에, 그리고 소명보다는 미래의 걱정 때문에 걱정하던 저를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은혜로 인하여 '은사'가 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생활하며 왜 제 설교를 듣고, 때로는 중요한 인생의 순간마다 상담하고 조언을 받아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합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바로 여러분도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사실에 근거하며, 이 근거야말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기오스'입니다. 이 말은 거룩하다는 '하기오이'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즉, 성도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구별되었을 때, 구별되지 않은 것과 차이점이 분명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condition에 의해 움직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position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까?" 환경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은 진정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기초는 우리의 포지션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하게 구별하여 부르셨다는 것에 우리의 identity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을 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이 무엇일까요?

신앙생활은 비슷하게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전에 김우영 목사님이 집회를 가셨을 때 이런 happening이 있었답니다.

새벽에 성경책을 들고 호텔 로비에 서 있는데 어떤 권사님이 다가오셔서 "목사님! 차를 타시지요." 하더랍니다. 그래서 차를 타고 가다 보니까, 그 방향이 아닌 것 같아서 물었답니다. "맞는 길로 가는 겁니까?" 그랬더니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라고 해서 도착해 보니 엉뚱한 교회더랍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목사님을 모시러 온 이 사람들의 교회에서도 집회를 하고 있었는데, 새벽에 목사님이 성경책을 가지고 나오는 모습만 보고 무조건 자기 교회로 모셔 갔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경험하고 나서 김우영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답니다.

"비슷하다고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그저 비슷했습니다. 성도로 불림을 받았으나, 성도로서 살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 것을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듯이, 그 교회를 처음으로 세운 사도 바울에게 고린도 교인들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유기성 목사님이 쓰신 [우리, 서로 사랑하자] 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라남도 어느 섬마을 학교에 선생님이 부임해 갔습니다. 가서 보니 아주 난감한 것이, 섬 아이들이 말하는 것이 다 욕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욕을 안 하게 만들려고 숙제를 내줬습니다. 딱지를 10장씩 나눠 주면서 욕을 하면 딱지를 뺏겠다고 했습니다. 욕을 안 한 아이, 남의 딱지를 많이 뺏은 아이는 상을 주고, 욕해서 딱지를 뺏긴 아이는 벌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검사하겠다고 했습니다.

학생 중에 선생님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매우 좋아서 선생님 말씀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욕을 안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욕이 나올 때마다 입을 틀어막아 보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말하면 다 욕이었습니다. 결국, 딱지 10장을 다 뺏겼습니다. 남의 딱지는 하나도 못 뺐고 자기 딱지만 다 뺏겼습니다.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하는데 어떤 아이는 딱지를 마흔 장이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상을 받았죠. 그런데 이 아이에게는 딱지가 한 장도 없었습니다. 결국, 교무실로 불려갔습니다.

"벌주겠다고 했지? 10대 맞아라, 뒤로 돌아서."

선생님이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시는데, 얼마나 세게 때리던지 3대를 맞으니까 더 맞으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도무지 더 맞을 수가 없어서 돌아섰습니다.

"선생님, 때리지 마세요. 죽겠어요."

그런데 뒤돌아선 순간 바라본 선생님의 얼굴이 눈물범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놈아, 내가 너는 믿었다."고 하셨습니다. 아이는 다시 돌아서서 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7대를 더 맞았는데, 하나도 안 아팠습니다.

아이는 교실로 돌아가서 책상에 엎드려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나는 커서 저 선생님처럼 될 거야."

학생이 욕한 것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면서 우시는 선생님의 얼굴이 아이를 바꿨습니다. 그 섬마을 아이가 바로 크리스천 치유상담연구원 원자이신 정태기 목사님이십니다. 목사님이 직접 하신 간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욕한 것 때문에 우는 선생님의 얼굴이 아이의 인생을 바꾼다면, 자기 안에 오셔서 내가 죄지을 때마다 아파하시는 주님을 정말 바라보며 산다면, 어찌 삶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통곡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은 우리가 죄지을 때마다 애통해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저와 여러분의 관계는 비슷한 관계가 아니라 정확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실한 믿음의 관계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여기에서 왜 저를 통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되나요? 이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쓴 것은 고린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쓴 것이 아니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교회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적어도 목회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은혜로 은사가 있는 사람, 그리고 여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도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아니, 그렇게 살아가려고 결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일 때, 오늘 우리가 함께 말씀을 이곳에서 묵상하며 고민하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설교ㅣ김병삼 목사(만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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