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단상] 한국기독교의 건국이념(2)

목회·신학
편집부 기자
김명구 박사(교회사학연구원 실행위원)
▲김명구 박사(교회사학연구원 실행위원)

3. 반공주의의 발현
1959년, 대한민국 공보실은 "리승만 대통령 각하의 정치이념은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이며, 이에 반하는 어떠한 독재주의나 침략주의도 이를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홍보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독재주의'나 '침략주의'는 모두 공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을 "몸서 체험과 시범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이론을 사상 체계화 해 우리 민족에게 '민족의 진로'를 명시"한 인물로 묘사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민족의 진로는 "반공, 자유, 민주주의에 입각한 민족국가의 완성"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이나 지성계는 북한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이승만의 권위주의 통치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보았다. 민주당 의원 신도성은 이승만 박사가 사용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는 "공산주주의자들이 스스로 민주주의를 참칭하는데 대하여 개념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쓰이는 것 같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서울대 헌법학 교수 한태연은 "한국의 민주주의는 가부장적 성격으로 위기에 처해졌다"며 이승만을 비판하고 나섰다.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기독교 사상의 기반아래 있던 민주당의 일각과 사상계의 시각은 이승만이 반공적 입장에서만 자유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은 기독교계를 비롯한 한국 보수정치의 중심에서 '반공'의 개념이 자유민주주의의 실현보다 우선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직후, 신간회 참여 경험을 가지고 있던 기독교 내부의 민족주의계는 거의 모두 강력한 반공주의자들로 변신하여 있었다. 한국 기독교회에서도 공산주의는 기피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공산주의를 혐오하게 된 것은 역사적 경험 때문이었다. 한국 기독교계에서 '반공'이 민주주의의 실현보다 앞섰던 것도 공산주의를 겪고 부터였다.

1925년 이후부터 조직적 기반을 확보했다고 생각했던 한국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배척하고 집요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단체 중 하나인 '한양청년연맹'은 기독교회의 '조선주일학교 전국대회'를 방해하며 노골적 반감을 드러냈다. 이들은 한국 기독교가 일본과 연계가 되어있다며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로 교회에 위해를 가했다.

다음 해에는 사회주의 청년 단체인 '청총'이 크리스마스를 '반기독데이'로 제정하는 등 갈등을 야기 시켰다.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가 "가상적 대상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존숭과 찬미의 신념으로 설립되는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를 변호하고 구가하는 한 고정적 제도", "자본주의의 호위병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자체와 운명을 같이 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계급의 정복, 민중의 마취가 이 종교에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 업고", "이민족의 지배가 이 종교에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 업다"고 노골적으로 맹비난하였다. 또한 "제국주의의 옹호자"이고 "노동 계급의 발흥을 막는 방어자"이며 "정신적 마취를 가져오는 아편장시(阿片場市)"라는 비판도 하였다.

천주교에 대해서도, 카톨릭이 세 가지 표상, 곧 '미신', '제국주의', '파시즘'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였으며, 가톨릭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는 당랑거철(螳螂拒轍), 독점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그룹, 개인주의로 영혼만 알고 육신을 아주 모르는 종교, 물질경시의 아편을 민중에서 철포(撤?)함으로써 민중을 지배한다고 비판하였다.

YMCA계와 동아일보계가 주도의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시작할 때, 공산사회주의자들은 대학보다는 차라리 대중교육의 보편화에 힘쓰라며 타도를 외쳤다. 또한 전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에서도 민족해방보다 계급 해방이 우선 과제라며 난동을 부렸다. 동아일보계가 주도했던 '김윤식의 사회장'과 연정회를 방해하거나 반대했고, 기타의 민족운동들도 방해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6?10 만세운동 때에는 "민족해방이 곧 계급해방이고 정치해방이 곧 경제해방"이요, "제국주의는 곧 자본주의"라며 민족자본가들이 포진하고 있던 민족주의계를 공격했다. 1930년대에도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순회 전도하던 목사들을 붙잡아 산채로 박피(剝皮)하거나 얼음물에 동사(凍死)시키고 익사시켰다. 물론 공산주의자들도 신간회 운동에 참여했지만 이는 코민테른이 민족혁명당의 건설을 위해 민족주의 단체와의 통합을 그 과제로 주었기 때문이다. 곧 코민테른 전략의 일환으로 신간회에 참여했을 뿐이다.

초기에 사회주의에 대해 긍정적 시각을 갖고 있던 YMCA의 지식인들도 사회주의가 극단에 빠졌으며, 사상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아 나누어 가진다"며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곧 사회주의가 반민족적이고 반기독교적이라는 것이었다.

사회복음주의자로 1930년대 장로교 농촌운동을 주도하였던 목사 배민수도 공산주의의 타도를 이 운동의 핵심으로 삼았다. 또한 1932년, 감리교와 장로교로 구성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도 "일체의 유물교육, 유물사상, 계급적 투쟁, 혁명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국의 모든 기독교계가 공산주의에 등을 돌렸던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 경험과 그 전통으로 인해, 한국 기독교계나 민족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기독교계 인물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냉소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기독교 민족운동의 계보아래 있었던 인물들이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했던 건준이나 박헌영(朴憲永) 등이 주도한 인민공화국을 거부했던 것은 당연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을 꾀하였던 여운형을 외면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한국 기독교회가 철저한 반공의 입장을 취한 것도 공산치하를 보다 선명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신의주에서 활동하다 월남한 목사 한경직은 서울에 영락교회를 세웠다. 그렇지만 그는 개교회의 담임자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월남한 기독교회들의 실질적 지도자였고 반공적인 한국 기독교회의 선도자였다.

월남하기 직전인 1948년 9월 28일, 기독교사회민주당의 주도자였던 한경직은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이 자치위원회와 언론을 장악했다며 공산주의의 행태를 고발하는 편지를 미군정에 보냈다. 월남한 후에는 설교를 통해, 공산주의가 무도덕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이중인격을 가지라(거짓말 하라)", "다른 계급은 모조리 숙청하라(강털 강도를 감행하라)", "무자비한 투쟁을 하라(테러, 살인, 방화, 무엇이나 좋다)"고 선동한다며 북한지역에서 겪은 일들을 알렸다. 그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문제는 반드시 막아야 할 신념이었고, 뚜렷한 반공 의식은 자신이 생존하며 겪어온 경험이었다.

당시 북한지역에서 소련은 기독교인들의 반탁운동을 기화로 체포와 투옥, 시베리아로의 유배를 감행하였는데, 대전 YMCA 총무를 역임했던 김영필(金永弼)의 어린 동생 김영봉(金永鳳)이 그런 이유로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또한 공산정권은 부락마다 농민조합을 만들어 적기가(赤旗歌)를 가르치고 기독교회를 정면에서 공격했다. 여기에 항의한 기독교 청년들이 조선민주당의 신탁통치 반대, 장대현교회에서 3?1절 기념예배 독자강행, 신의주 학생사건, 기독교청년들의 강양욱 목사 사택 폭탄투척 사건 등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결국 공산당을 반대하는 적지 않은 수의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버리고 월남해야 했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남한의 단독선거를 위한 여론을 조사할 때, 한국 기독교를 대표해서 자문에 응했던 한경직은 "총선거문제에서 소련이 보이코트 한다고 할지라도 월남동포가 약 350만 명으로 추산되며, 월남 동포는 비교적 지식층과 정치적 역량이 있는 자들인 만큼 이들을 이북 대표로 하여 총선거를 해도 당연하며, 이로써 수립되는 정부를 단정이라고 함은 부당하며, 즉 통일정부 수립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북한 공산정권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한경직은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산주의를 유물론에 입각하여 종교를 지배자의 권력을 유지하고, 민중의 혁명의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민중의 아편으로 보았다. 또한 공산주의가 종교를 부정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종교를 왜곡하고 결국 이 땅의 기독교를 박멸하려고 한다고 보았다. 신앙인이요 목회자였던 그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는 삼천리강산을 삼키려는 "괴물"이요, 영적 적대 세력인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이었다. 기독교를 말살시키려는 사탄의 세력이었고 배격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목회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을 영적 실체로 인식하고 있었던 인물 중 하나가 조병옥이었다. 미군정 경무국장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여과 없이 발휘했던 그는 흥사단계의 일원이었다.
조병옥은 1946년의 '대구 폭동'을 예를 들며, 공산주의자들을 향해 "사탄과 같은 존재"라고 맹비난하였다. 법과 질서를 존중하지 않고, 사리와 판단력이 박약한 청소년층과 천진무지한 노동자 농민을 선동과 모략을 동원하여 파괴와 살상을 일삼는다는 비판도 하였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일당독재와 계급독재로 민주주의 말살하고 국민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주장도 하였다. 민주주의 세계의 건설을 위해 공산주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되고, 공산주의와 어떠한 타협이나 합작이 있을 수 없다고 피력했다. 건준과 인공을 타도하고 공산주의자와 대결하는 것이 한민당의 목표라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1927년의 신간회 운동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그의 인식이 바뀐 것이다.

감리교 목사로 감리교 중앙신학교 등에서 교수와 학장을 역임한 바 있던 정일형도 폭력혁명과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하였고, 군정청 문교부장 오천석 또한 공산주의가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라며 반공을 강조했다. 군정장관 행정고문이었던 김동원은 반공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이를 무기와 수단으로 하여 북한을 통일시켜야 하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흥사단 내부에 안창호의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초계급적 민족민주주의로 해석하여 좌우합작을 주장하는 소리도 있었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했고 흥산단계의 주류는 반공을 최우선의 가치로 내세웠다. 기독교계 내부의 민족주의계 후예들은 반공을 건국의 근간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계속>

발제 : 김명구 박사(교회사학연구원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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