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기장 역사와 위대한 장로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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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설립자 필헌(必獻) 김대현 장로
총회 역사위원장 이상호 목사(공주세광교회 담임)   ©공주세광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역사를 짧게 정리하면서 귀감이 되는 장로들 몇 분을 소개하려고 한다. 작년에 총회 역사위원회에서는 새 역사 60주년을 맞이하여 교단을 소개하는 소책자를 만든 바 있다. 본인이 위원장으로 재직 중에 만든 자료집이기에 여기에 기장의 역사를 그대로 옮겨 본다.

1부.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사 요약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개혁주의 장로교 신학과 신앙을 계승한 교단으로서 특별히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지난 1953년 제38회 호헌총회를 통하여 한국 교회 개혁의 기치를 들고 "새 역사"로 출발하였으며 '복음의 자유', '신앙양심의 자유', '자주, 자립 정신', '세계 교회와의 협력병진'을 주제로 선교의 대장정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 교회는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조선에 입국하기 전에 중국에서 선교사들의 성서번역에 참여하던 조선인들은 복음을 처음으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만주 일대 한인촌에 성서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권서의 노력은 만주 한인촌을 신앙공동체로 바꾸는 열매를 맺었다. 또한 백홍준, 이성하, 서상륜 등은 비밀리에 성서를 조선에 가지고 들어와 전파하였고, 이들을 통해 1884년경 평안도 의주와 황해도 솔내에 조선 최초의 개신교 교회가 세워졌다.

한국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민족적 교회라는 점이다. 기독교는 근래에 수용된 외래종교임에 틀림없지만 민족의 존립이 위태롭던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교회는 민족을 살리는 길에 앞장섰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기독교는 우리민족의 종교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3·1만세운동의 주도와 적극적 참여는 교회와 우리 민족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토대가 되었다.

■ 조선신학교의 설립과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발

일제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서 선교사들은 장로교회의 유일한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를 폐교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일부 목회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오히려 전화위복의 전기로 삼았다. 근본주의적이고 문자주의적인 선교사가 주도하던 조선교회는 이제 조선인이 주체가 되는 교회를 세우고 운영하여야 할 때임을 천명한 것이다.

조선신학교는 근본주의 일색의 당시 조선의 신학계를 반성하며 세계 신학의 조류와 교류하며 세계적 수준의 신학교육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경건하면서도 자유로운 신학연구를 통하여 자율적으로 가장 복음적인 신앙에 도달하도록 지도할 것이며, 세계 신학의 제 학설과 성경에 대한 현대 비평학을 소개하는 등 학문의 자유를 강조하며 보다 나은 목회자 양성을 신학교육의 목표로 삼고, 1940년 조선신학교를 출범하게 되었다.

1952년 제37회 총회는 성경무오설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조선신학교 김재준 교수에게 목사 면직 처분을 내리고, 조선신학교 졸업생들에게 일체 교역자 자격 부여를 금지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나 절차상으로 하자가 있는 이러한 결정은 곧 반발에 부딪쳤으며, 이듬해 제38회 총회에서 경기노회는 김재준 목사파직이 불가하다는 노회결의를 보고하였다. 그러나 총회가 파직 결정을 강행하자, 결정의 불법성을 주장하는 전국의 목회자들이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제38회 호헌총회를 별도로 회집하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총회의 헌법유린, 신앙양심 자유의 유린, 소수파당에 의한 총회 유린 등을 고발하고 한국장로교회 개혁을 위한 새 역사 출발을 선언하였다.

■ 하나님의 선교와 민주화운동, 그리고 성풍회와 교회성장

1970년대 김재준 목사의 '역사참여 신학'과 WCC의 '하나님의 선교신학'(Missio Dei)은 기장의 신학적 토대이자 선교방향이 되었다. 김재준 목사는 인간 존엄성의 회복인 '인간화'와 선교적 소명을 다하는 '교회의 사회화'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기장의 자기정체성 확립은 '4대문서'를 통해 확정하였고 선교이념을 따라 기장은 민주화·인권운동을 활발히 수행하였다. 또한 수도권 빈민지역에 교회설립을 추진하여 1980년대 민중 교회 운동의 모판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민중신학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독재 민주화 인권 투쟁과 빈민 선교 운동은 정권의 탄압과 박해를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기장 교회의 신자 증가율이 다른 교단에 비해 현저히 정체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풍회는 기장의 편향적 선교이념을 비판하고, 한편으로는 교회의 수적 침체를 반성하면서 등장하였다. 이들은 기도원 영성을 강조하며 기장교회 내에 성령의 뜨거운 바람을 불게 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매해 첫 주간 알파성회를 가졌으며, 이후 직영기도원(마석기도원)을 세우게 되었다.

■ 통일운동과 제5문서, 그리고 전진하는 선교운동

1980년대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민주화의 선결과제가 자주적 분단극복과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70년대의 민주화 인권 운동은 통일운동으로 이어졌고,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84년부터 통일문제연구위원회를 구성하고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1986년 평화통일자료집 제1집(분단의 원인과 민족공동체의 실상)과 1987년 평화통일자료집 제2집을 출간하여 전국교회에 배포하였다. 동시에 1987년 '제5문서'를 제72회 총회에서 채택하였다. 제5문서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장의 자기반성에서 출발하였다. 기장은 4대문서의 유의미성과 유효성을 재확인하고 시대적 변화에 따른 선교 교육정책을 보완하여 제5문서를 선포하게 되었다.

2003년은 기장의 새 역사 50주년을 맞이하는 희년의 해였다. 이에 기장은 '2003년 희년 신앙선언'을 선포하고 제5문서의 뒤를 이은 '희년문서' '장로교신조모음' '희년예배서' '새 역사 50년사' 등을 출간하였다.

그리고 다방면의 선교 과제들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 총회본부 내에 비전2015운동본부와 생태공동체운동본부, 평화공동체운동본부 및 한기장복지재단 등을 구성하여 선교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는 서대문 시대, 종로5가 시대를 지나 2005년부터 수유리 시대를 시작하였다. 기장은 197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해온 아카데미 하우스 입주를 통해, 지난 50여 년간 전개해온 민주화 운동과 평화통일 운동을 계승하며 더욱 적극적인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운동과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사회선교의 다변화의 중심에서 선구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또한 한신대학교 서울캠퍼스와 가까운 거리의 총회는 상호 원활한 협력을 통하여 민족주체적 신학 이론과 실천을 접목하는 더욱 수준 높은 단계로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로운 교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2부. 교단 역사 속에 빛나는 위대한 장로들

교단의 역사에 관심을 갖다보니 제주도로부터 전국 각지 기독교역사에 대한 순례와 탐구를 하게 된다. 아름다운 교회역사와 귀감이 되는 숨은 이야기들을 찾는 기쁨은 아주 크다. 그중에서도 전국장로연합회 회보에 내는 글이기에 우리 기장 역사에 빛나는 몇 분 훌륭한 장로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 한신대학교 설립자 필헌(必獻) 김대현 장로

김대현 장로는 경북 영일에서 출생하였다. 부모의 신앙으로 옥해제일교회에 출석했다. 자수성가한 김대현은 일찍이 분가하여 광산업을 시작하였고 재산을 모았다. 많은 재산 때문에 일본 경찰과 친일세력인 일진회(一進會)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독립자금을 상해로 보냈던 일로 여러 번 경찰서를 드나들기도 하였다.

그는 서울로 상경하여 동대문구 창신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하였다. 그리고 당시 창신교회 건물신축을 위해 많은 헌금을 냈다. 창신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종로 2가 인사동에 있는 서울 승동교회로 이명하였다. 여전히 교회 봉사에 있어서는 그를 따라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때마침 장로를 선출하는 일이 있고 승동교회 교인들은 한결같이 김대현 집사를 장로로 선출을 하였다. 이미 이 교회에는 백정 출신 박성춘 장로가 있었다.

김대현은 1923년 50세의 나이에 장로로 장립을 받고 승동교회는 계속 성장해 갔다. 교회가 성장하는데 재력가인 김대현 장로의 힘은 대단하였다.

조선신학원을 설립할 당시 인가를 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는데 김대현은 자신의 재산 50만원을 선뜻 내놓고 허가를 얻었다. 그리고 직접 이사장, 원장의 직분까지 맡게 된 것이다. 당시 50만원의 사재는 오늘의 화폐 가치로 환산한다면 수백억 원에 해당될 것이라 추측된다.

김대현 장로는 그 직책을 오래 감당하지 못하고 1940년 9월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비록 그는 삶을 마감하였지만 그의 신앙심은 이후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 헌신적이었다.

교회에 재정이 부족하다면 의례히 김필헌(金必獻) 이름으로 된 통장을 주면서 얼마든지 찾아 부족한 액수를 채우라고 했다고 한다. '필헌'이라는 이름은, 이름 그대로 하나님께 반드시 바칠 헌금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김대현 장로는 삶을 마감했지만 그가 남기고 간 재산은 조선신학원을 운영하는 데 잘 사용되었다.

김대현 장로의 재산으로 형성되었던 조선신학원은 해방 후 조선신학교로, 다시 1953년 한국신학대학으로 발전했으며, 현재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경기도 오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수유리에는 한신대학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뒤편에 노석공원에 김장로 3부자의 묘원이 있으니 수유리에 가면 둘러봄직 하다(계속)

글ㅣ이상호 목사(공주세광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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