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인간의 고통, 하나님의 뜻인가

김민수 목사, 기장 총회교육원   ©한국기독교장로회

최근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 대형보수교회 목사들과 단체들이 '하나님의 뜻' 운운하며 희생자들과 유족들과 국민 가슴에 대못질을 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더욱이 국무총리 지명자인 온누리교회 문창극 장로는 '하나님의 뜻'을 여기저기 붙여가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정의된 전통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범주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못할 일 없으신 하나님, 모든 것을 예정하시는 하나님 등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통적인 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이뤄지는 것으로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인간의 말할 수 없는 고통까지도.

그러나 정말 그런가?

모든 사람은 고통스런 사건이 간혹은 위대한 선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고통을 통해 교훈을 얻는 측면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거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고통은 선보다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으로 일제강점기를 통해서 자주독립국가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지만, 그로 인한 해악은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유신독재를 통해서 광주학살을 통해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고, 많은 이들이 이런 악한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투쟁했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없다. 분단체제 역시도 동일하다. 분단을 통일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미군을 붙잡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 역시도 궤변에 불과하다.

이런 고통은 아예 없었던 것이 더 선하다.

만일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이 세상이 다스려진다는 그들의 주장대로하면, 하나님의 뜻이려면 일제강점기도 없었어야 하며, 유신독재나 광주학살, 분단상황....이 모든 것들은 아예 없었던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다.

고통스러운 사건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 신학자 메슬은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1. 나는 그 사건이 있었던 것을 감사한다. 당시에는 고통스러웠지만 그 경험을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으며, 내가 그 사건으로부터 얻은 교훈은 그 문제들을 훨씬 뛰어넘는 가치가 있다.

2. 그것은 시련의 경험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3. 나는 그 경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때문에 몇 가지 방식에서 더 발전된 사람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 내가 선택할 수 있었다면 나는 그 사건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4. 그것은 고통스런 경험이었다. 나는 그런 고통과 함께하는 법을 배웠고, 그 고통을 선용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그 경험은 언제나 내게 깊은 유감이다.

5. 끔찍했다. 내가 겪었던 고통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 보자.

여러분은 1-4항목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대체로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은 1,2항을 따르라고 할 것이다. 3항의 경우는, 이미 일어난 일이므로 큰 의미가 없다. 4항과 5항이 타당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악이나 해가되는, 고통을 주는 일들이 일어난다. 인간은 그것들과 싸운다. 최소한 그러한 악한 것들과 싸우는 것을 악이라고 말하지 않으려면 악을 선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번에 문창극 장로의 경우에는 스스로의 발언을 합리화 하기 위해 '악을 선이라고 하는 누'를 범하고서도 아무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누구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 경험은 4항과 같이 깊은 유감이며, 그 고통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회복시킬 수는 없지만, 다시는 이런 류의 불의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사고 원인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고원인과 책임자처벌이 100% 완수된다고 하더라도, 그 사고로 인해 사회전반적인 안전불감증이나 맘몬위주의 사고방식이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사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3항처럼 지금은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으므로, 사고원인에 대한 철저한 규명과 책임자 처벌, 유족들에 대한 적절한 예우를 요구하는 것이 선이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중심적이고 근시안적이다. 하나님이 사랑은 인간의 사랑보다 위대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이 고통을 막으려는 것보다 훨씬 더 능동적으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고통이라도 막으려고 하신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역할은, 하실 수 있는 일은 고통을 예방하는 데 능동적이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것 외에는 하실 수가 없다. 그 부르심에 인간이 응답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속수무책이다. 하나님의 힘, 그것은 강압적인 힘이 아니라, 설득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설득하시지만, 인간이 설득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많은 이들이 죄의식을 느끼고 부끄러워했다. 자신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그러한 원인이 있게 한 것과 다르지 않는 삶의 양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의 결과다.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악을 허용한 것 같은 상황인 것이다. '막을 수 있는 악을 허용한 것은 그 악을 직접 일으킨 것만큼이나 죄된 행위'라는 메슬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끔찍한 악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더 큰 선을 위해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으로 계속 주장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깊은 상처를 입히는 것이며, 모멸감을 주는 행위다.

메슬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고전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을 따라 행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막을 수도 있었던 악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옆에서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과정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을 따라 행동하고 살아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 내에서 악과 그로 인해 생기는 고통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통을 막을 수 없을 때에는, 즉 우리 인간의 연약함이 허락된 자리에서는 아픔으로 그 고통에 동참해야만 한다.

명쾌하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해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신앙적인 행동을 해야 할 것인지가 명료하다.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고통의 상황이 생겼으므로, 이제 아픔으로 동참하는 일 외에는 우리가 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공>, 글ㅣ김민수 목사(기장 총회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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