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상(像)을 만든 조각가는 우상 숭배자인가?

칼럼

 

▲조덕영 박사

‘문화와 예술 활동과 기념물의 형상은 모두 우상 숭배인가?’

 

이 문제는 우상 숭배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는 가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보기보다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간단치 않고 대단히 어려운 문제로 보이는 군요. 또한 개인별, 교파별 신앙과 신학적 교리의 차이가 너무 큰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민감하고 엄격한 교단이 있는 가 하면 너그러운 교단이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심지어 십자가 형상까지 거부하거나 작은 형상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교파나 교인들이 있는 상황입니다. 개인별, 교파별 이런 상이함 때문에 불필요한 논쟁거리를 만들거나 거기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공개적 발언을 자제해 온 것이 아닌 가 생각되는 군요.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우상과 우상 숭배에 대한 개념 정리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구약의 “우상”이라는 단어가 여럿 있습니다. 그 중 “페쎌”(graven, image, 출 20:4; 신 4:16, 23,25; 사 40:19, 44:9,10,17)의 어근은 “조각하다”인데 나무, 돌, 바위, 금속 등 물질에다 형상을 새긴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elilim(레 26:1, 사 2:8, 18:20, 19:1,3)은 “없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도 바울이 우상은 실재하지 않는다(고전 8:4)고 한 것은 이 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신약에서 우상은 형상(形像)을 의미하는 eidolon(eidwlon, 고전 5:10, 11; 엡 5:5; 계 21:8, 22:15)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상 숭배’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허무한 것(무신, 잡신, 사물, 이념, 형상, 인간 뿐 아니라 돈, 쾌락, 과학, 명예와 명성과 같은 탐욕과 탐심 등을 포함한 것)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이라 정의하면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봅니다.

인류는 역사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거나 섬기지 않으면 다른 피조물이나 그 양상을 섬겨 왔는 데 이미 모세 시대부터 애굽에는 수천의 신이 있었다는 것이 오벨리스크(obelisk)에 남겨진 문자를 통해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농경신 오시리스(Osiris)를 비롯하여 자칼의 머리를 가진 아누비스(Anubis), 심지어 악어의 일종인 크로커다일(crocodile)까지 섬겨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애굽을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약속의 땅 가나안 조차 땅의 창조자이며 폭풍우의 주관자인 엘(El)과 엘의 배우자인 아세라(Asherah) 그리고 풍요의 신 바알(Baal)과 여신 아스다롯(Astarte, Ashtaroth), 가정의 신 드라빔(teraphim) 등 우상숭배가 범람한 장소였으니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이 처한 험난한 영적 도전이 이해가 갑니다. 사사기는 이런 혼돈 역사의 대표적 시기였지요. 1998년 서울서 열린 <다윗의 도시와 성서의 세계 유물 전>에 가보니 이미 다윗 시대 당시 가나안 땅에는 엄청난 우상들이 가득 넘쳐나고 있었음을 유물 등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주로 사도 바울의 서신을 통해 우상 문제를 알 수 있는 데, 초대 교회 시절에도 우상 숭배(롬 1:18-25) 행위가 만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행 17:23)을 섬기던 헬라 사람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고, 우상 숭배를 육체의 일(work of flesh, 갈 5:20)로 여기며 조심하고 경계하며 피해야 할 일(고전 10:14)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은 어떤 실재는 아님(고전 12:2; 갈 4:8; 살전 1:9)을 분명 말하고 있고 단순한 형상 숭배만 우상 숭배가 아니라 탐욕 자체가 상징적 우상 숭배(엡 5:5; 골 3:5)임을 규정하여 우상 숭배의 개념을 확장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상 숭배는 주로 구약 개념으로서의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과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하나님보다 더 섬기려는 마음의 탐욕’을 포함한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상 숭배’와 ‘단순한 예술과 기념으로서의 작품’은 구별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단순한 예술과 기념으로서의 작품은 타락(마귀적이고 세속화된 죄성의 발현으로서의 타락)된 본성이 작용한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 영역의 발현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영역인 창조 세상도 물론 타락하여 왜곡되고 허물어진 면은 있으나 모두 마귀적이라고 보기는 곤란한 면이 있습니다. 칼빈도 창조 영역을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이라 하였지요. 탁월한 예술가들인 브살렐과 호홀리압과 솔로몬과 많은 성전 건축가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다는 것은 일반 은총 영역을 통한 하나님 영광의 광채와 회복된 영성으로서의 일반 은총 영역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죄악과 무관한 자연 은총으로서의 학문과 예술 활동은 권장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경우는 분명 그것을 증거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2,930명의 실명 인물 중 악기 연주가요 시인이요 음악가요 세속 왕이었던 다윗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께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송을 들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인류 최고 지혜의 사람 다윗의 아들 솔로몬도 학자요, 건축가요, 예술가요, 원예학자요, 생물학자요, 토목학자요, 음악가요, 시인이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만일 이런 학문과 예술과 문화 활동이 모두 부정적인 것이라면 이 세상 모든 건축물, 악기들, 미술 작품, 장신구, 장식품, 기념품, 각종 예술품, 미용물품, 미용성형술, 자동차, 인터넷, 휴대폰 등 모든 문명의 이기들은 모조리 파괴 되어야 할 겁니다. 맥밀란이라는 사람이 자전거를 발명하였을 때 영국에서 악마의 발명품이라고 그리스도인들의 자전거 타는 것을 금지하였다는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신앙적으로 부담이 되고 하기 싫으면 각 개인이 판단하여 자신은 문화적 활동을 자제하거나 기념의 상을 남기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면 될 것입니다. 다만 예술과 학문 모두를 거부하거나 어떤 기념물이 예배의 도구나 탐욕스럽게 섬기는 우상 숭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떤 타인이나 단체가 어떤 이의 믿음과 삶을 기념하는 작은 표지(標識)를 남기는 것에 대해 개인이 나서서 요란스럽게 적극적 반대를 표명하는 식의 개입은 조금은 덕스럽지 못하고 주제 넘는 경우라 생각됩니다. 작은 지식보다 서로가 화목함이 더 은혜 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청교도 국가로 출발한 미국이 많은 기념물의 나라라는 것에 시비 걸지 않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라 생각됩니다. 그런 게 부담 되거나 싫다면 우리는 안 하면 되겠지요.

반대로 형상(이미지)이 경배의 대상은 아니나 예배에 도움은 된다고 주장하면서 거부가 아닌 한걸음 더 긍정적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전을 좀 더 거룩하게 보이도록 각종 장식을 하거나 거룩하고 구별되어 보이도록 준비된 성직자 예복, 요즘 유행하는 영화 예배, 촛불 예배, 이머징 예배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청중의 더 큰 호응과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방식이지요.

이런 경우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첫째, 인위적 장치들이 동원됨으로 인한 물적 비용의 증가, 그로 인한 교회의 양극화 초래와 점점 더 강력하고 커다란 자극의 필요성 대두 둘째, 인간이 지닌 치명적 약점인 동일한 이미지에 대해 다른 생각 즉, 가견적 신의 상징물이 동원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한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고정시키고 제한시킬 위험성 등입니다. 인간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상(像)이나 그림에 의존합니다. 형상을 미리 준비하고 고정 시키면 사람의 의식은 자유로운 성령의 역사보다 고정된 개인적 감성에 더 이끌리게 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미지(형상)에 대한 집중은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 세계에 묶어 놓음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상(像)을 만들 가능성이 커지게 됩니다. 물론 형상뿐 아니라 에덴 동산에서 하와가 당한 유혹과 바벨탑 언어 분산 이후 언어도 참 진리를 담아내는 데 많은 어려움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좀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하나님 말씀 전파를 위해 오직 말씀이 아닌 ‘이머징’을 예배와 양육에 도입하려는 시도가 최근 커졌습니다. 이런 경향이 바람직 한 것인지 아닌지는 조금 더 진지한 토론과 모색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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