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평화통일, 예수의 원수사랑 정신 구현되어야"

오피니언·칼럼
오상아 기자
saoh@cdaily.co.kr
2014년 사순절, 이기영 목사의 '십자가의 신학과 숨어계신 하나님'

1. 시작하는 말

이기영 목사   ©기장총회

역사는 어떤 목적을 향하여 발전하는 것입니까? 현대 세계사에서 한반도의 분단의 역사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 까요?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북 분단국으로 남아 무고한 민중들만 신음하고 있는 현 상황은 어떤 숙명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세계사의 새로운 창조를 위해 어떤 세계적 사명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실존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역사는 자유의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라 했고, 역사가 토인비는 역사는 우주적 교회(universal church)의 실현을 위해 달려가는 것이며, 어거스틴은 그의 <신국>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그 자유와 사랑과 평화의 역사 완성을 위해 발전해가는 것이 역사라는 말입니다. 헌데 우리 한반도는 오랜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2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에 의해 우리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없이 분단의 아픔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한민족은 이 분단을 포기하지 않고 자유와 사랑과 평화의 통일실현을 목표로 삼고 통일운동을 전개 하여야 합니다. 이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적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금년에도 사순절을 맞으며, 한반도 주변에서는 군사연습을 맹렬히 하면서 말로는 통일을 무성하게 주고 받고 하는 실정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종교개혁자의 십자가의 신앙과 숨어계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특히 한국사의 고난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말입니다. 당장 죽지 않아도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각오를 하고 하루하루를 죽으면서 사는 삶의 태도를 말함입니다. 바울은 "자기는 날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살고 있노라" 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십자가는 이미 2세기 중엽부터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마침내 정착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처형대인 십자가 틀이 어떻게 종교의 상징이 될 수 있었을까요? 무엇보다도 콘스탄티누스 대제(313년) 이래로 로마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 역할을 한 긴 역사를 가진 그리스도교가 이것을 고수해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리스도교가 권좌에서 영광을 향유하는 동안 예수상은 날로 영광의 승리자로 승격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 때는 십자가보다 무덤을 박차고 손에 승리의 깃발을 들고 나오는 승리의 예수상이 그리스도교의 상징처럼 그 중심에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틀이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계승된 것은 바울의 영향에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역사의 예수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역사적 사건으로 가장 확실한 예수님의 죽음만은 절대 중요시 했으며, 이 사건 위에 자신의 신학을 정립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말하는 대신 예수의 죽음의 역사적 사건 (정치적으로 죽음 당함)을 가장 잘 나타내는 십자가를 말했습니다(고전1:17-18). 바울은 자신의 사상 중심에 십자가 사건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물론 이 말씀의 배경에는 아덴 선교에서 쓴 경험의 배경이 깔려있기는 합니다만, 바울로서는 비장한 새로운 결단 하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예수는 언제 어디서 왜 누구에게 어떻게 십자가에 처형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의 의미를 자세히 제시해 줍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목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고전2:23-24).

3. 십자가 신학에 대한 이해

순교신학자 본 회퍼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값비싼 은혜(costly grace)로 풀이 하였습니다. 그의 저서 <제자도, The cost of discipleship>에서 루터의 세속화 곧 수도원의 문을 박차고 나와 세상을 향해 십자가를 지는 행위를 값비싼 은혜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참된 예수님의 제자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세속 사회 속에서 짊어지고 그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참된 제자직 수행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는 값싼 은혜(cheap grace)일 따름입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빛에서 몰트만은 그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전개한 것입니다. 엘리비젤의 <밤, Night)에 나타난 숨어계신 하나님을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몰트만은 연결 짓는 것입니다. 원인도 모르게 죽어가는 유대인의 죽음 속에서 지금도 신음하고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해석합니다. 몰트만은 루터의 신학이 너무나 실존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고 했고, 사회윤리적 차원으로 전개되지 못 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오늘의 역사현장에서 고난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적 해방운동을 해석합니다.

4. 루터의 생애를 통해 나타난 십자가 신학

루터는 고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으며, 고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그는 고난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제단이 된다고 말합니다. 고난의 목적은 은혜요 정결함입니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보름스 국회(The Diet of Worms)로 가는 루터의 개혁자적인 결단의 정점(頂點)을 이루었으며 그의 신학적 근거를 만들었다고 해석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한국신학연구소 1979. 215) 루터는 보름스 국회 이후 평생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불면증으로 시달렸고, 마침내 협심증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일생은 고난의 연속이요, 그의 십자가신학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자)로서의 고난체험 속에서 형성된 살아있는 신학(Living theology)이었습니다.

루터의 대학생활 시절에 성직자로서의 그의 소명체험도 고난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루터는 아버지의 요구대로 법학을 연구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는 벼락을 맞아 죽고, 그는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 성 안나를 부르고 서원기도를 하였습니다. "성 안나여! 살려 주소서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이 서원은 심사 숙고한 결단이 아니라 큰 위기의 순간에 그의 입에서 튀어 나온 고백이었습니다. 1505년 7월 17일 아버지와 친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에르프로트 수도원에 들어 갔습니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영적 유혹, 즉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찾기 위한 기나긴 영적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이 질문은 "선행적 의인화"(work justification)사상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그러한 영적 유혹이 없었다면, 당시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해서나, 연옥에서 번민하는 가족들을 위해서나, 면죄부 같은 것을 사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초기의 루터의 고민도 바로 이러한 영적인 관심, 즉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루터의 영적 실존적 갈등과 번뇌와 갈급함의 내적 아픔, 심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결국 성직에의 좁은 길, 순례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루터는 그의 스승이자 어거스틴 수도원장이었던 스타우피츠(Staupitz)의 지도하에 1508-9년 동안 영적인 문제를 신학적으로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1510년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이 규칙을 강화하고 재정비하는 일을 위해 대표로 뽑혀,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교황청의 빌라도 법정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올라가면서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심한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로마방문은 로마교회의 세속화를 개탄하고 비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적 갈망을 해결시켜주기는커녕 오히려 깊은 영적 시련의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에르푸르트로 돌아온 루터는 스타우피츠에 의해 다시 비텐베르크로 재임명되어 1511년 이후 계속해서 살다가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비텐베르크는 그의 삶의 중심지가 되었고, 또한 그의 종교개혁신학과 운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1512년 10월 루터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동시에 그는 성서주석과 강의를 맡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루터는 스콜라주의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과 펠라기우스 주의의 자유의지에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의 이성적 사변에 의해서나 자유주의적 결단과 선행의 노력으로 구원 얻을 수 없음을 확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어거스틴 신학에 입각하여 인간구원에 있어서의 의지의 노예신세를 강조하고 믿음으로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받음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로마서 강해중에 특히 1:17절을 명상하고 읽고 하는 중에 무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가 아니라, 우리를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는 엄청난 용서의 은총을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것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성곽 예배당 정문에 게시된 95개조 항의문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가톨릭 측의 존 엑크와의 논쟁이 그를 어렵게 만들었고, 1520년 결국 가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받고, 황제 찰스 5세도 루터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선포하게 됩니다. 1521년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는 유명한 최후 진술 "하나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Here I stand, help me, God!)를 남겼습니다.

그 후 루터는 프레데릭 4세의 도움으로 변장을 하고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그 동안 그는 깊은 미로 속에 있는 골방에서 쉬운 독일말로 신약을 번역하는 위대한 작업을 하였습니다. (지원용. 편, <루터 사상의 진수> 컨콜디아사 1989. R. 프렌터 "십자가의 신학" 137-156 참조)

1523년 이후 농민전쟁으로 루터는 종교개혁에 오점의 사건을 남기게 됩니다. 물론 논의 의 여지는 있겠지만, 제후와 귀족계급을 옹호했고, 농민 전쟁 지도자 뭔처나 농민들의 비난을 받게 됩니다. 1524년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과 1525년 루터의 <노예의지론> 논쟁으로 인문주의운동과 완전히 이별하게 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1525년 6월 13일 농민전쟁 중에 루터는 수녀였던 카타리나 본 보라(Katharina Von Bora)와 결혼 하였습니다. 루터는 수녀원의 수녀들을 결혼시키는 중매쟁이 역할을 한 셈인데, 마침내 모두들 신랑을 찾아가고 카타리나 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신랑감도 열심히 찾았으나 성사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장가를 가 준 셈입니다. 수도사로서 수녀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가톨릭으로부터 타락한 성직자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절망에 빠진 루터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부인 카타리나는 검은 장례 복을 입고 그를 맞이 하였습니다. 그때 루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왜 그가 죽은 것처럼 절망하였는가를 반성하고 다시금 용기를 얻고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습니다.

참된 신학자는 책을 읽고 명상하고 사변하는 데서 만들어 지지 않고 삶과 죽음, 비난과 고난 속에서 만들어 집니다. 루터의 삶의 뼈아픈 고난의 십자가가 가시와 같이 그를 찔렀기에 그의 십자가 신학이 살아있는 신학(Living theology)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5. 숨어계신 하나님

루터는 우리의 신학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속성의 양면성, 곧 계시하는 하나님과 숨어계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절규 속에서도 침묵하고, 외면하고, 숨어계신 하나님(the hidden God)은 숨어계신 방법으로 현존합니다(the hidden presence of God).

루터의 십자가신학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신약의 바울, 고대교회 어거스틴, 중세의 베르나르드, 현대의 키엘케고르의 저술들에 나타나 있습니다. 루터의 십자가신학의 독특한 점은 그의 히브리서 강해(1517-18)의 이른바 12:11절 주석에서 나타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라고 합니다.

루터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며 고통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처형의 고통과 치욕아래 감추어 있음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베일로 가리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진술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았다는 사랑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2)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한에 있어서만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골고다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자신의 십자가의 신비한 동일성은 루터의 십자가신학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루터의 십자가신학은 근본적인 삼위일체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창조자 성부하나님, 구속자 성자하나님, 구원자 성령하나님은 십자가 안에서 계시되며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이런 이유로 섭리, 구속, 구원은 모두 십자가의 표지아래 위치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전 삶을 십자가에 순응시키는 성령은, 성부와 함께 우리의 구속을 성취한 성자에게로,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십자가에 달린 성자와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성부에게로 우리를 이끌므로 역사하십니다. 이리하여 십자가를 감금하려 드는 교회나 종교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 사이에 우리가 세우는 벽들을 부수어 졌습니다. 이것이 루터의 십자가신학의 본질입니다.

중세 수도원적 경건에 뿌리를 가졌던 십자가신학은 루터를 수도원 밖으로 이끌어 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십자가는 더 이상 수도원생활 중에서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서 그의 계급이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시련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적 삶은 더 이상 종교개혁이전의 수도원에서 금욕적 경건이나 고해실 안에서의 무절제한 시련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매일의 봉사 안에 있습니다. 루터는 성. 속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루터는 "마리아의 찬가"(Magnificent)를 해석하면서 신앙과 기도에 대해 말할 때, 신성한 영역이 아니라 지상의 삶에 대해서 언급하며 올바른 기도를 아주 대담하게 묘사 했습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 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 셨도다"(눅1:51-53). 여기에서 루터는 영적 굶주림과 갈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육체적 굶주림과 갈증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기아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원용.편, <루터 사상의 진수> 컨콜디아사, 1989, R. 프렌터 "십자가의 신학" 137-156 참조)

6. 고당 조만식의 신앙과 순민(殉民)의 길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은 기독교신앙의 바탕에서 일제강점기와 해방초기에 교육 경제 언론 체육 정치 등 근대 한국민족 민주통일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가 태어난 1882년은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한국의 신구세력이 치열한 대결을 벌이던 해였고, 그 해 5월에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고 한국이 서양에 대해 문호를 처음 개방한 해입니다.

그의 생애를 일별해 보면, 대부분 사회적, 민족적 활동은 기독교신앙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고당은 1905-1908년 숭실학교에서 좋은 벗들을 사귀며 새로운 신앙에 심취하며 내일을 준비하였습니다. 숭실과 기독교신앙, 그의 생애에 다가왔던 이 두 사건은 조만식을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1908년 3월에 숭실을 졸업하고 4월에 동경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 3년간 영어를 전공하였습니다. 이 때 고당은 인도 간디의 <자서전>을 읽고 그의 무저항주의와 채식주의에 철저히 공명하였습니다. 뒷날 그가 한국의 간디로 추앙 받게 되는 것은 이런 계기가 있었습니다. 29세에 영어학교를 졸업한 그 해 1910년 메이지 대학 법학부에 진학하였습니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아 많은 우국지사들이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고당은 뜻이 있어서 기독교신앙을 가졌기에 일시적인 분노에 좌절을 절제할 수 있었습니다. 고당은 귀국 후 오산, 광성 등 기독교학교에서 성경교수와 설교를 통해, 산정현교회 장로로 평양 YMCA총무로 활동하며 한국기독교계의 지도자로 등장하였습니다.

고당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신앙은 자신의 인격 속에서 육화(肉化)되어 실천적인 삶으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자기의 인격으로 살려고 하였고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초기부터 칼빈주의적인 청교도신앙과 그 실천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칼빈주의적 청교도성은 생활의 절제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서구의 칼빈주의가 갖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정직과 신의 근면함과 절제, 절약으로 집약됩니다. 고당은 생활의 절제성을 대단히 강조하였습니다. 그의 물산장려운동도 이러한 절제운동에서 출발했고, 민족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깊이 인식한 데서 나온 신앙적 소산입니다. 고당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민족경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고당의 삶을 요약한다면, 신앙과 절조-순교자와 동행하고 순민(殉民)의 길을 걸으신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였습니다. 산정현교회 장로로 당회에 참석하지만 별로 말이 없었고, 그의 감화와 위력에 의하여 당회는 일치단결하며 바른 결정을 하며 교인을 감독 선도하였으며 교계의 거성인 강귀찬목사 박형룡박사 송창근 박사 그리고 한국기독교 순교사상의 샛별인 주기철목사 같은 분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고당과 산정현교회의 이 같은 자세는 그의 제자였던 주기철목사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주 목사는 그 의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산정현 교우들과 함께 걸어갔던 것입니다. 신사참배반대라는 하나님의 뜻이 산정현교회 현장에서, 정치적인 면의 조만식 장로와 종교적인 면의 주기철 목사의 양립과 조화로서 영광의 승리가 성취되었습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의 고당 조만식 장로는 우리민족 역사에 길이 횃불이 될 것입니다.

옥문 밖에서 순교자와 동행했던 고당은 해방 후 자신을 기대하는 수많은 백성들을 위해 자기의 한 목숨을 버리는 순민(殉民)의 길을 걸었습니다. 한 몸이 살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나 혼자만이 살기 위하여 이곳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을 버리고 떠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일천만 북한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기로 했소." 라는 비장한 결심은 바로 일제하의 순교자의 길을 걸었던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전자가 하나님 이외에 어떠한 존재도 숭배하지 않겠다는 '숭신(崇神)신앙'에 근거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이 창조한 그러나 의지할 데 없는 민중들을 끝까지 봉사하겠다는 '활인(活人)신념'에 근거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두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고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숭고한 신앙인의 길이었습니다. (이만열, <역사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7. "그리스도교 신앙인 고당 조만식" 168-208 참조).

7. 한반도 분단상황에서의 고난사관

한국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고난의 역사! 한국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바닥 가락은 고난입니다. 이 땅도 이 사람도 큰일도 작은 일도 정치도 종교도 예술도 사상도 무엇도 다 고난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럽고 쓰라린 사실임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2012. 93-94)

한과 압박과 억압과 부끄러움과 고난과 가난은 한국역사의 기초이기에, 그것은 함석헌의 개인적 경험과도 연결되는 것이요 또한 그가 소위 역사교사로서 한국역사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인데, 공교롭게도 1930년대의 한국민족의 현실이요 20세기 한국역사의 현주소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함석헌선생은 또한 한국이 지정학적 이유에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지적합니다. 한반도는 아시아대륙과 일본 열도 사이에 위치해 있어서 통로로 제공합니다.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확장시키는 장점을 지니지만, 잦은 외국의 침략과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약점입니다. 그래서 열강의 세력다툼의 장이 되어왔고 한 때는 중국과 일대일로 싸우기도 했지만 결국은 수 당 명 청 등 중국의 지배를 당하였고, 근대에는 몽고의 침입과 임진왜란이 있었고, 현대에는 청일전쟁 노일전쟁 그리고 한일합방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장공 선생은 "분단의 한과 한풀이"에서 한반도 분단의 역사적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두 진영으로 갈라져 38선에서 딱 부딪쳤는데 그 운명에서 새로운 사명을 발견함이 38선이 창조할 소명이라 했습니다. (<김재준 전집 18> 332-340 참조). 그럼에도 한민족은 역사상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한민족은 평화를 사랑하고 자비로운 높은 도덕수준을 가졌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평화의 심성이 고난의 역사의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함석헌 선생은 이 민족을 큰 길가에 앉은 거지처녀, 수난의 여왕이라고 비유했습니다.(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2012. 110).

함석헌선생의 역사이해의 주춧돌은 '고난사관'의 뿌리와 토양이, 성서의 '고난의 메사아' 사상과 접촉점이 있음이 확실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들이 주전 6,7세기 포로기 시대에 겪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 그들의 율법서, 예언서, 역사서 등을 남긴 '삶의 자리'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제2 이사야의 '고난의 종의 노래'(53장)는 징계와 훈련을 통한 사랑의 채찍질이라는 도덕적 교육적 시각을 넘어섰다고 해도,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가들의 사관은 인과응보적인 시각의 차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과 치욕과 멸망과 징계를 받은 것은 야훼와의 계약을 어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민족의 큰 사상가 함석헌선생> 한길사 2001. 김경재 "함석헌사관의 기독교적 요소" 365-382 참조).

함석헌선생은 고난은 인생을 심화합니다. 고난은 역사를 정화합니다. 평면적이던 이도 이를 통하고 나면 입체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고, 더럽던 압박과 싸움의 역사도 눈물을 통하여 볼 때에는 선으로 가는 힘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중국의 교만, 만주의 사나움, 일본의 영악, 러시아의 음흉이 다 견디기 어려웠지만,...우리가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은 살고자 하기 때문이요,...살려주시는 것은 할 일이 있는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맡은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고난의 초달(橽楚)을 견뎌야 한다고 강변하셨습니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2012 130 참조).

노명식은 그의 논문 "토인비와 함석헌의 비교시론-고난사관을 중심으로" 에서 함석헌의 고난사관은 그의 삶의 절규에서, 토인비의 고난사관은 그의 학문적 탐구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민중과 내적 프롤레타리아(inner proletariat)의 고난이 역사탄생의 수단임을 비교, 연구하였습니다. 쇠망해가는 낡은 문명 속에서 고난 받는 내적 프롤레타리아는 새 문명탄생의 수단이요 번데기(chrysalis)인데, 이 내적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경제적 정신적 고뇌의 산물이 고등종교라고 해석합니다. 노명식은 그 내적 프롤레타리아가 함석헌의 민중개념과 유사함을 밝힙니다. (노명식 "토인비와 함석헌의 비교시론-고난사관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연구논총 제3집 서울 숭전대학교 출판부 1985 182-83)

8. 분단상황의 재조명과 과제

우리는 분단 70년을 맞으며 분단의 재조명과 과제를 위한 이정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1)분단역사의 원천을 제2차 세계대전 말엽 테헤란, 카이로, 얄타, 포츠담 등지에서 찾는 일에서 깨어나서 우리민족내부의 분열에서 찾아야 합니다. 2)8.15해방직후 '신탁통치안'을 분별 있게 판단하여 겨레의 운명을 결정할 만한 지혜가 당시 지도자들에게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반탁, 찬탁 성명으로 싸움만 하는 동안 38선은 점점 공고한 분단의 성벽으로 바뀌었습니다. 백범 김구는 분단의 제물로 한민족의 골고다를 거룩하게, 장엄하게 가신 분입니다. '민족의 지상명령', '바른 길', '양심'을 좇아 '38선 취소'와 '남북통일'을 주장하며 남과 북의 단독정부수립을 죽음으로 반대했던 것입니다. 3)남북이 38선으로 굳어져 버린 후 쌍방간에 높인 구호들은 남한의 '북진통일'이고 북한의 '무력통일'이었습니다. 양쪽이 분단체제를 더 강화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강압정책, 독재정권을 유지해온 과거였습니다. 냉전의 높은 철벽은 낮아질 줄 몰랐습니다. 4)분단 40년의 험준한 가시밭길 위에 민족사에 남을 꽃밭이 있었다면, 1972년의 "7.4공동성명"이었습니다.(이윤구, "분단현실의 극복을 위한 제언" 기독교사상 1985 6월호)

5)동.서독의 통일 과업수행을 보면서, 남북한의 재조명과 과제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 합니다. 독일교회는 민족의 분단과 상황에 처한 한국교회에 중요한 관심사 입니다. 물론 분단의 역사와 상황이 비슷한 것 같지만 한국과 독일은 그 역사적, 정치문화적, 민족사회적 상황이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나 그래도 한국교회는 독일교회로부터 배울 바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독일민족은 70년대 초에 브란트 정부의 동방정책(Ostpolitik)으로 동.서독 관계의 정상화를 할 때 절대 통일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한 민족 두 국가라는 생각으로 이산가족을 결합시키고 방문과 교류를 증대하고 학술, 종교, 문화의 공동작업을 통해서 민족의 단일성(Einheit des Volkes)을 유지해 가자고 했습니다. 즉 아직 통일은 못했으나 자녀교육문제, 제사문제, 가문의 예절이나 체통문제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유지하자는 방안입니다. 실제로 서독교회는 동독을 위해서 서독교회 예산을 42%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남북한 통일에 대한 중요성은 동북아는 물론 전세계의 평화안전유지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한반도는 미일중소의 4대 강국의 관심사이며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거나 완화될 때 한반도에서 주는 영향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주변강대국들은 남북한 관계변화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때로 한반도가 그들의 적극적 정책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전쟁재발을 억제하고 현상을 유지함으로 그들의 국가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입니다. 남북통일문제에 강대국들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통일은 남북 당사자간에 자주적인 방법으로 남북 주도적으로 나아가야 할 중대한 과제가 있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남북은 서로간에 상대방을 자극 비방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 한민족 남과 북이 주변 강대국들과 편가르기로 군사적 힘이나 훈련을 연습하는 것도 지혜롭지 못할 뿐 아니라 유념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남북평화통일은 예수님의 원수사랑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6.25한국전쟁의 아픔을 우리 한족이 서로 원수 됨을 용서하고 화해하며 자존심을 심어주고 신뢰하며, 대화하고 사랑과 물질을 나누는 운동을 펴는 일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한민족에게 주시는 하늘의 뜻이고 사명입니다.

이기영 목사는 한국신학대학 신학과 졸업 후,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석사 수료, 샌프란시스코대학교 D.min. 과정을 이수했다. 목회는 천은교회에서 목사 안수 후 한일교회 부목사를 거쳐 목포중앙교회를 시무했으며, 미국 뉴욕주에 위치한 임마누엘한인장로교회(미국장로교단)에서 목회를 한 후 은퇴했다. 기장 총회 전남노회장, 총회 평통위원장를 역임했다.

#이기영 #사순절 #칼럼

지금 인기 많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