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묵상] 율법의 저주에서 아브라함의 복으로

본문: 갈 3:10-18

♦오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다. 내 존재의 실체와 신앙의 실체를 밝히 드러낸다. 기독교 신앙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과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 양분된다.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복음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진리에 합당한 신앙생활은 '십자가 복음을 듣고 믿음'에 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살고, 십자가에 죽은 자에서 하나님으로 사는 자, 내가 하나님안에 감추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에 합당한 삶은 하나님이 주신 힘, 즉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에 있다.

이와 배치되는 신앙, 즉 비복음적인 신앙생활은 '율법의 행위'에 따른 신앙이다.
이는 내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 '내 힘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렇게 믿게 되면 신앙생활을 할수록 괴로움이 더한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갈 3:4).

인간이 주체가 되어,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어리석고 헛되고 불가한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특이하게도 '자기 힘'으로 살며, 초월적 영역인 하나님까지 믿으려 한다. 이는 에덴에서 범죄한 이후 '하나님같이' 되고자 한 처절하고 비참한 본성이다.

바울도 복음을 계시로 깨닫기 전에는 이와 같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믿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복음을 듣고도,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믿는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성령으로 시작했다고 육체(자기 힘)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사도중의 수장 베드로, 은혜의 복음 전도자 바나바도 돌발적인 상황앞에서는 복음의 진리대로 행동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유대인 관행)으로 하나님을 믿는 실수를 하지 않았던가!(갈 2:12).

이는 오늘도 우리의 모두의 신앙의 실존이다.
한시라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기를 자각하지 않으면, 나로 살고, 내 힘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그렇다면 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믿어서는 안되는가!
이는 그 즉시, 저주를 부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10절)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타락하자,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셨다(창 3:14).
사람은 저주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들을 보내셔서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다(창 3:15)
인간에게는 그대신 실존의 고통을 주셨다. 살아가는 현실 자체를 고통스럽게 하신 것이다(창 3:16-17). 이것 또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는 포석에 다름 아니다.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통해 구체적으로 약속되었다.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라는 언약이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 주시겠다는 '복'은 에덴에서 상실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실존"의 복이다.
즉,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고 돌보는 것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문화명령을 준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복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셨다.

"이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옵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믿음으로 받게 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14절, 쉬운성경).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의 죽으심에 연합된 자(함께 죽은 자, 갈 2:20)로 하여금 하나님과 연합되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인도하는 복음의 실체이다(벧전 3:18, 히 10:19).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다(시 105:8-9).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430년후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온 백성들에게 주어진다.
이것이 출애굽후 석달이 지난다음,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계명을 주신 의미이다. 하나님의 복은 아브라함 개인에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확장되어 계시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은 모든 세계로 확장된 것이다(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으니).

개인에서 한 나라로, 한 나라에서 모든 민족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방식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계명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계명과 더불어 하나님이 임재하신다(삼상 3:21). 그리고 계명을 스스로의 힘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주체가 되어 지키신다.

여기서 믿음으로 계명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사람이 주체가 아닌, 하나님이 주체'가 됨을 말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계명을 지키겠다고 응답한다(출 24:3). 이는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신앙하겠다는 도발이며, 존재에 무지한 본성의 발로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무지했더라도 이것은 하나님 앞의 범죄이다(갈 3:19). 언제든지 죄악은 존재의 무지, 주제파악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은 자유와 존엄의 속성상, 언제나 인간의 자의적 선택을 허락하신다.
이로써 계명과 하나님은 분리되었고, 하나님이 분리된채, 계명을 밖에서 주어진 율법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또다시 존재무지에서 도발한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율법을 지키면 축복하시겠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저주하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기준은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신 2726). 어떤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기준대로 율법을 지킬수 없음은 하나님 자신이 더 잘 아신다. 그래서 백성들이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에 무지한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리가 없다. 계속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 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셔서, '너희는 율법을 지킬수 없노라, 내게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스스로 정하신 법,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하신다는 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은 그 마저도, 아들을 보내셔서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게 하셨다(갈 3:13).

내 힘으로 살아온 인생, 내 힘으로 하나님을 믿어온 모든 삶은 십자가에서 아들이 대신 저주받으셨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그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언약, 비록 다시 하나님을 떠나 율법의 저주아래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담당시키셨다. 그리도 본래의 약속,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복으로 주신 것이다.

이 아침,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을 누리고 있다.
오늘도 나는 보혈을 지나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다.
그 얼굴, 하나님의 존재안에서 내 존재의 수치, 비참함, 불가해한 상황은 다 가리워진다.
오직 하나님으로 살게 하신다. 하나님의 힘으로 신앙하며, 오늘 하루를 살게 하신다.

♦묵상 기도

아버지.
내 힘으로 살며, 내 힘으로 신앙하며, 내 힘으로 사역해온 모든 날들은 율법의 행위였습니다.
내가 받을 저주를 아들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내 힘으로 살고, 내 힘으로 믿고자 하는 옛 사람이 출몰합니다.
종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시라도 내 힘으로 믿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매일 십자가에서 죽은 나를 바라보며,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살게 하소서,

자연을 향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바라봅니다.
그도다 더 크신 성실하심이 종에게 있음을 바라봅니다.
오늘도 이같은 아버지의 사랑안에서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말씀묵상선교회 #서형섭목사

지금 인기 많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