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묵상] 은사에 대한 지식, 주님과의 관계가 근본이다

본문: 고전 12:1-11

♦오늘의 말씀

"형제들아 '성령의 은사들'(spiritual gifts)에 대하여 너희가 무지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1절).
그러면서 그들이 이미 경험했을법한 영적 세계를 언급한다.
그들이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도 못하는 우상의 이끌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2절).

'이끌려가다'(헬, 아파게스세이)라는 말은 이방종교에서 나타나는 경험을 표현한다.
이것은 인간이 초자연적인 것에 사로잡히는 황홀의 순간을 암시한다.
당시 루시안은 패리스의 사랑의 힘을 언급하면서 '일종의 신이 자기 마음대로 우리를 끌고 다니므로 그에게 저항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악한 영이 이방예배에 참여하는 자들을 황홀하게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이방세계에서도 신들린 현상이나 황홀경을 체험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같은 현상이나 체험들은 하나님의 영, 성령의 영을 통한 것들과 전혀 다른 것으로 구별되어야 마땅하다.
즉 이 같은 현상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영이나 성령의 활동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는 저주받으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는 주시다'라고 할 수 없다(3절).
이 말씀의 전제는 어느 누군가가 '예수는 저주받으라'고 외치면서, 자기가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율법이 정한대로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받아들였다(신 21:23).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는 나무에 달려 죽으며,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 회당에서 신앙의 부인을 강요받고 '예수는 저주받은 자'라고 고백하였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리 강요를 받아도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또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다른 신들을 내세워 그리스도를 저주하지 않을 것이므로, 만일 부인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런 자들은 풀어주는 것이 나는 옳다고 생각하였다'(플리니의 서신).

'예수는 저주받으라'는 말과 '예수는 주시다'라는 말은 양극단을 이룬다.
그것은 열심 있는 유대교 신자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바울 자신의 고백이기도 하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주시다'라고 고백하는 자는 어떠한 박해의 상황에서도 결코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다.

초대교회 당시 이방세계는 로마 황제를 주로 고백하였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박해는 물론 죽음으로 끌려가는 상황을 자초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는 배도가 아닌 죽음을 택하였다.
여기서 성령이 하시는 일의 원천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 된다.

참된 기독교인의 징표로서 '예수는 주시다'는 단순한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신앙고백이다.
예수가 주가 되시며 그를 주로 부르는 그리스도인은 그의 종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는 성령을 통해 주종관계로 맺어진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고백이다.
그의 서신서는 '예수가 나의 주'라는 표현보다 자신이 '그의 종'(노예)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현상으로서 영감이나 체험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범사에 그에게 복종하는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자, 성령으로 사는 자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딛 3:6-7 참조).
바울은 성령의 근본적 목적을 논한 후 이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를 시작한다.

은사들은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각 지체들에게 분배된다(나누어진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다. 또한 받을 수도 없다.
그러나 모든 은사는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경쟁심이나 불만이나 우월감을 품을 여지가 없다.

"섬기는 일도 나뉘어져 있으나 같은 주를 섬기는 것이며"(5절).
성도들은 각기 받은 은사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봉사한다.
은사들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으며 공동체에 봉사하는, 또는 공동체를 통해 주께 봉사하는 도구가 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주의 종들이므로 궁극적으로 모든 봉사를 주께 돌려야 한다.

"일을 운영하는 데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것을 운영하시는 이는 같은 하나님이시다"(6절).
그리스도인들은 각기 분배받은 성령의 은사가 서로 다르다.
그리고 그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몸인 주님을 섬기는 일에 드려진다.
그런데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이 일은 하나님이 친히 운영하신다(이루신다).
여기서 은사를 주시는 성령과 섬김을 받으시는 주님과 활동하시는 하나님 안은 하나를 이룬다.
그러므로 성도는 받은 은사로 주를 섬기고, 그 일을 하나님 안에서 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교회를 세우는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성령이 나타나주신 것은 서로의 유익을 위함이다"(7절).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로 고백하였다.
이로써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게 된다.
그리고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은사는 서로의 유익, 곧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성도에게 나타나는 은사는 각 사람에게 분배되는 데 아래와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신다(8절).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 안에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신다(9절).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들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능력을 주시며,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을 분별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을 말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능력을 주신다(10절).
지금까지 열거한 은사들은 한 분이신 성령의 활동이다(11절).
이렇게 성령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누어주신다(11절).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말씀 그 자체이다. 말씀이 곧 영적인 선물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봉사이자 교회를 세우는 영적 선물이다.
성령의 은사로서 믿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유지하는 믿음이 아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13:2)이 암시하고 있듯이 '병 고치는 은사'와 같은 특별한 능력을 요청하는 믿음을 말한다.

예언의 은사는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과 구별되며 영감 받은 설교자가 하는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말하는 것인지, 다른 영이나 자기 안의 영을 힘입어 말하는 것인지 분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는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에 의해 통제받는다(14:32).
방언의 은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하는 것이며 그 식별을 위해 통역이 필요하다(14장에서 상술함).

성령의 은사들에 있어 그 서열이나 위계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모든 은사는 그것이 중요하든 중요하지 않든 같은 근원인 성령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신자에게 어떤 은사를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몫이다.
그러므로 은사에 대해 자랑할 것도 없고 열등감을 가질 것도 없다.
은사들은 교회의 존재 기반이 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가 교회의 존재기반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역사로 세워진다.

한국교회는 고린도교회만큼이나 은사가 풍부하다.
특히 각종 은사로 인해 양적으로 부흥함으로써 그에 대한 논란도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은사에 대한 현상에만 몰두하거나 겉치레 지식을 갖게 되면 정작 중요한 신앙의 본질은 놓치고 만다.

모든 은사는 '예수는 주시다'라는 고백 아래에 있다.
곧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어떤 존재방식을 갖느냐 하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가 주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종이 되어 복종의 삶을 사는 것이 근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보내시는 성령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고 영생의 삶을 누리게 한다.
이것이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이며, 일반적이고 부수적인 사역으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은사를 받았어도 그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다.
오직 주를 섬기는 일에 드려져야 하며, 그 일을 하나님 안에서 행해야 한다.
곧 항상 두렵고 복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이며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다.
은사에 앞서 주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 이것이 본질적인 물음이다.

♦묵상 기도

아버지여...
한 때 은사가 나타난 현상을 체험한 자였습니다.
그런 은사를 주고받는 집회를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은사에 대해 무지한 채 망령된 일을 행한 자였습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성령의 뜻대로 주시는 은사를 내가 전달하는 것인 양 교만한 자였습니다.
오, 주여!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는 멸망에 이르나이다.

아버지...
하오나 택한 자녀이기에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고 심판 중에 긍휼을 베푸셨나이다.
만물에 속한 것이 제거된 그 자리에 영존하는 것이 남겨졌습니다.
황폐한 상황에서 하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말씀으로 살며 영생의 진리를 전하는 자로 세우셨나이다.
감히 죽기에만 합당한 자를 말입니다.

아버지여...
이제는 성령의 은사를 내려주소서.
오직 복종하며 충성하오니 각양 은사를 통해 주를 섬기게 하소서.
주께서 하신 일, 영혼들을 영생의 진리로 이끄는데 드려지게 하소서.
함께 하는 뭇교회, 뭇성도들과 더불어 당신의 몸을 세우게 하소서.
만물에 속한 것에서 안정을 구하지 아니하오니 제하여 주소서.
오직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당신의 품에서 안식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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