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 고전 1:10-17
또한 고린도는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로서 철학과 지혜가 발달하였다.당시 지혜를 설파한 철학자 또는 지혜자들은 탁월한 웅변술로 대중들을 설득하여 자기에게 속하게 하였다. 대중들은 자기 취향에 맞는 지도자들을 따르고 그들을 자랑하였다.
고린도는 12개의 신전이 있는 종교도시로서 종교성이 매우 강하였다. 치료의 신인 아스칼립포스 신전이 도시 근처에 있었고, 아폴로 신전이 도시 한 가운데 있었다. 물론 그곳에는 유대인 회당도 있었다. 고린도 사람들은 많은 신과 주들을 두었고(고전 8:4), 다양한 영적 현상에 몰입하였다(고전 12:1).
한편으로 고린도는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였다. 법이 없는 상업도시가 그러한 것처럼 부도덕한 행위들이 난무하였다. 특히 아프로디테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매춘을 조장하였다. 바울 이전 B.C 2세기경 파괴된 신전에서는 1,000명의 신성한(?) 창녀들이 매춘을 하곤 하였다. 그래서 '고린도인처럼 되다'라는 헬라어는 '성적으로 문란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같은 사회, 문화, 종교적 배경으로 보아 고린도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동시에 이들이 책망할 것이 없는 신자로 서 갈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다.
고린도교회 내부에 교회의 창설자인 바울을 따르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시대에 뒤진 사람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따른 이들도 있었다. 마치 개척한 목사보다 뒤에 오는 목사를 따르는 신자가 있듯이 말이다.
아볼로는 성경에도 능통했지만 달변가였다(행 18:24). 바울은 말이 시원치 않았는데(고후 10:10), 그것은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이 아닌 말에 설득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고전 2:3-4).
특히 당시에는 헬라 철학자들이 웅변술을 배워 자기의 도를 설파했기 때문에 거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볼로를 추종하고 그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게바에게 속한 자도 있었다. 게바는 베드로의 본명(아람어)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의 대표자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이다.
볼품없는 바울보다 오순절 설교를 통해 3천명을 회심케 한 베드로를 추종하는 것은 사람을 자랑하고 드높이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연한 일이다.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있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당연한데 왜 한 분파로 말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그래서 로마의 클레멘스는 여기 언급된 분열에 대해서 처음에 나온 세 이름만 쓰고 있다. 그는 이들 세 사람(바울, 아볼로, 게바)은 모두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3장 22절 말씀을 고려하여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의 모든 사본들은 네 번째로 그리스도 파를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고린도전서 주석가'맨슨'의 제안이 지지를 받고 있다. 곧 여기 언급된 그리스도파는 그리스도가 '신, 자유, 불멸성'등과 비슷한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 파당이었다는 것이다.여기서 신은 철학적 일신론을 의미하며, 자유는 유대교의 청교도적 엄격함으로부터 벗어난 해방을 의미하며, 불멸성은 유대교 개념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의 교리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가 어찌 나뉘었는가?(13절). 그리스도는 하나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하나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각기 자기 당파로 가져가려고 하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지도자를 따르는가 말이다. 그들은 바울의 이름이 아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는가?
바울은 그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 세례를 베풀지 아니함을 감사한다(14절). 그것은 아무도 그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것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15절).
바울은 세례 자체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초대 교회의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됨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의식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세례를 주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느냐이다.
그런데 이교도의 성례전 사상이 교회에 틈입하면서 세례를 주는 '그 사람'을 추종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세례를 집행한 자에게 더 비중을 두게 된 것이다. 기독교의 세례는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어진다. 이에 누가 세례를 주든 집행하는 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믿음을 주고 그 징표로 세례를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주든 상관없는 세례에 착념하지 않고 자신은 오직 복음을 전하는 자임을 표명한다(17절).
과연 그들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는가? 우리가 과연 그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가? 어떤 목사는 자기가 세례준 사람들의 숫자를 자랑한다. 어떤 목사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자랑한다. 바울이 자랑하기를 두려워한 것을 그대로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명은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자기의 사람을 만들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께 속하게 한다. 세례의 집행자는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는 것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묵상 기도
아버지... 이 땅의 성도들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을 따르고 사람을 자랑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땅의 지도자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내 편, 내 교회,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있는 이들을 끌어내리소서. 지도자도 성도도 모두가 당신의 것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