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돌아보면 놀라운 역사의 한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전쟁의 폐허와 절대적 빈곤 속에서 출발한 대한민국이 불과 한 세대 만에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루고,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선진국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우리는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기적을 경제성장이라는 숫자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시대를 살아낸 국민의 땀과 희생, 그리고 가난을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겠다는 정신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과정에서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이 국민교육헌장이다. 1968년 12월 5일 선포된 “국민교육헌장” 은 당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국민이 지녀야 할 가치와 자세를 제시했다. 성실과 창조, 개척정신, 협동과 봉사, 책임과 의무, 공익과 질서 등은 가난과 혼란을 극복하고 국가를 새롭게 건설하기 위해 요구되었던 시대적 가치였다. 물론 국민교육헌장에 기독교 신앙이 직접적으로 명시된 것은 아니다. 국민교육헌장은 국가 차원의 교육이념과 국민윤리를 담은 선언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의 정신개혁과 농촌개혁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된 근면·절약·봉사·희생·자립의 정신이 사회변화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작용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중심에 김용기 장로가 있었다.
김용기 장로는 신앙을 말로만 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삶으로 실천하며 황무지를 개척하고 농촌을 살리며 사람의 정신을 변화시키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그가 세운 가나안농군학교는 단순한 농업기술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을 깨우고 생활을 변화시키는 정신교육의 장이었다. 근면하게 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스스로 일어서고, 이웃과 함께하며, 나라를 위해 봉사하자는 가나안의 정신. 그 바탕에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기독교 신앙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난한 농촌에서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고, 그 희망을 땀과 실천으로 연결시킨 것이 바로 가나안농군학교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박정희 대통령과의 역사적 만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용기 장로와 가나안농군학교의 활동에 관심을 가졌고, 당시 농촌을 변화시키기 위한 국가적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나안의 경험과 정신은 중요한 참고 모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후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은 대한민국 농촌 변화의 핵심 구호가 되었다. 물론 새마을운동 전체를 가나안농군학교 하나의 영향으로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지나친 단순화일 것이다. 그러나 김용기 장로가 실천한 가나안의 개척정신과 근면·자립·봉사의 가치가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맞닿아 있었고, 당시 농촌개혁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평가할 만하다. 여기에서 국민교육헌장과 새마을운동 사이의 의미 있는 연결고리를 발견하게 된다. 국민교육헌장이 국민의 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적 선언이었다면, 새마을운동은 그 정신을 생활 현장에서 실천한 국민운동이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 행동이 바뀌면 생활이 바뀐다. 생활이 바뀌면 마을이 바뀌고, 마을이 바뀌면 나라가 바뀐다. 이것이 대한민국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변화의 원리였다. 당시 대한민국에 필요했던 것은 물질만이 아니었다.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개척정신,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는 자립정신,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수고하는 봉사정신, 그리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오늘의 희생을 감수하는 책임정신이 필요했다. 이러한 가치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삶의 정신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성경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말씀한다. 또한 “각각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수고하라”(살전 4:11)고 권면한다. 성실하게 일하고, 자기 삶에 책임을 지며, 이웃을 섬기는 정신은 기독교 신앙이 오랫동안 강조해 온 중요한 생활윤리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평가할 때 경제정책과 정치지도자의 역할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그 시대 국민을 움직였던 정신을 함께 보아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개발 정책과 국민교육헌장이 제시한 가치, 김용기 장로와 가나안농군학교가 보여준 기독교적 생활정신, 그리고 새마을운동의 근면·자조·협동정신은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서로 만나 대한민국의 변화에 하나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물론 그 시대의 모든 정책과 방식이 오늘날 그대로 계승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역사는 공과를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폐허와 가난 속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흘렸던 국민의 땀과 눈물, 그리고 그들을 움직였던 정신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오늘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경제력과 기술력, 문화적 영향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가 곧 국가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가. 근면보다 편안함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책임보다 권리를 먼저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공동체보다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희생과 봉사보다 성공과 안락함만을 좇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경제개발 계획만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다시 일으키는 정신개혁이 필요하다.
국민교육헌장이 강조했던 책임과 의무, 협동과 봉사의 정신을 오늘의 시대에 맞게 되살리고, 김용기 장로가 보여주었던 가나안의 개척정신과 근면·절약·봉사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 자리한 이웃 사랑과 섬김의 기독교 정신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로마서 12장 2절) 결국 나라를 바꾸는 것은 제도만이 아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물질만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과 정신이 새로워질 때 사회가 새로워지고, 사회가 새로워질 때 나라의 미래도 달라진다. 대한민국의 기적 뒤에는 수많은 국민의 땀과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땀을 가능하게 했던 정신이 있었다. 국민교육헌장이 일깨우려 했던 정신, 가나안농군학교가 삶으로 보여준 정신, 새마을운동이 생활 속에서 실천했던 정신. 그 정신은 결국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잘살아 보자”는 공동체 의식이었다. 이제 대한민국은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더 많이 가지는 나라를 넘어 더 바르게 사는 나라, 더 빨리 성장하는 나라를 넘어 더 따뜻한 공동체를 이루는 나라, 물질적으로 부유한 나라를 넘어 정신적으로 성숙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다음 기적은 새로운 기술이나 경제성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정신이 살아 있으면 가난한 나라도 일어설 수 있고, 사람이 바로 서면 한 나라의 미래도 다시 세울 수 있다. 이것이 국민교육헌장과 가나안농군정신, 그리고 새마을운동의 역사가 오늘의 대한민국에 남겨주는 소중한 교훈이다.
양기성 교수(Ph.D., Hon. Th.D.)
서울신학대학교 행정학 특임교수
웨슬리언교회 지도자협의회 대표회장
#양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