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교과서와 음악책, 그림책, 요리책, 그리고 북한 신자가 손으로 옮겨 적은 것으로 전해지는 성경과 찬송가까지. 누군가 읽고 밑줄을 그으며 곁에 두었을 북한의 책과 기록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북한인권정보센터(NKDB)는 9월 21일부터 임창호 목사 기증품전 《서재 너머의 삶》을 북한인권전시실에서 일반에 공개했다. 이번 전시는 임 목사가 미래 북한인권박물관 건립 취지에 공감해 지난 6월 기증한 북한 관련 서적과 기록 500여 건 가운데 주요 자료를 선별해, 상설전시 《오늘의 명주》가 진행 중인 북한인권전시실 내 작은 기획 코너에서 소개한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임 목사의 서재에 모인 기록들은 이제 북한인권전시실의 서재로 자리를 옮긴다. 전시는 기증품과 NKDB가 기록해 온 북한 주민의 증언을 함께 제시하며, 책에 담긴 공식적인 세계와 그 책을 읽고 배우며 살아온 사람들의 실제 삶을 살펴본다.
책으로 배운 세계와 책에 적히지 않은 삶
NKDB에 따르면 의 교과서에는 수학과 과학, 언어와 예술 등의 지식과 함께 지도자에 대한 충성, 집단주의, 계급의식, 사회주의 체제 수호와 같은 가치가 담겨 있다. 이러한 정치사상 교육은 혁명역사와 같은 전용 교과뿐 아니라 국어·영어·도덕·음악 등 일반 교과의 지문과 문제, 노래에도 나타난다고.
전시에서는 교과서와 음악책, 그림책을 북한에서 실제 학교생활을 경험한 이들의 증언과 함께 소개한다. 한 북한이탈주민은 교과서가 학생 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학생들이 땔감과 교실 꾸리기, 각종 교육비를 부담해야 했다고 증언했다. 관람객은 책이 전달하는 공식적인 가치와 그 책을 배우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마주한 현실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고 NKDB는 전했다.
요리책 너머, 속도전떡으로 이어간 삶
기증 자료에는 『조선료리집』을 비롯해 『조선의 지방료리』, 『조선의 민족음식 떡』, 『가정료리교실』 등 북한의 음식문화와 조리법을 보여주는 다양한 요리책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책에 소개된 음식을 모든 주민이 일상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시는 풍성한 음식이 담긴 요리책과 옥수수가루에 물을 섞어 빠르게 만들어 먹는 ‘속도전떡’에 관한 증언을 함께 보여준다. 한 사람은 “옥수수 펑펑이 가루가 내 재산이자 목숨이었다”고 증언했다.
출판될 수 없었던 책, 손으로 전해진 성경
기증품 가운데에는 북한 신자가 손으로 옮겨 적은 것으로 전해지는 신약성경과 교독문, 찬송가도 포함돼 있다. 여러 경로를 거쳐 임 목사가 오랫동안 보관해 온 자료로, 이번 전시에서는 주요 필사본을 종교 박해에 관한 NKDB의 증언과 함께 공개한다.
NKDB에 따르면 에서는 성경을 소지하거나 종교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중대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동시에 NKDB가 발간한 『2025 북한종교자유백서』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북한이탈주민 15,303명 가운데 589명인 3.9%가 북한에서 성경을 본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NKDB는 “관람객들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지켜낸 신념의 증거인 필사 성경을 직접 따라 쓰며 신앙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전했다.
한 사람의 서재에서 미래 북한인권박물관으로
기증자인 임창호 목사는 사역자이자 교육자, 북한인권 활동가다. 고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교수와 교학부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탈북배경 청소년을 위한 장대현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2000년 무렵 탈북민들의 증언을 접한 것을 계기로 북한인권과 탈북민 정착 지원 활동을 시작했으며, 2014년 장대현중고등학교를 설립해 탈북배경 청소년의 배움과 자립을 지원해 왔다.
북한자료 기증품의 일반 공개에 앞서 9월 18일 오후 3시에는 임 목사와 관계자가 참석하는 오프닝 및 기증식이 열렸다. 임 목사는 이날 20여 년간 자료를 수집하고 간직해 온 과정과 미래 북한인권박물관을 위해 기증을 결정한 배경을 소개했다.
NKDB는 20여 년간 축적한 북한인권 기록과 증언을 시민들에게 전하기 위해 북한인권전시실을 운영하고 있다. 4월부터 진행 중인 상설전시 《오늘의 명주》에는 개막 이후 1,600명 이상의 국내외 관람객이 방문했다. 이 전시는 북한 주민, 한 사람의 집과 일상을 따라가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북한인권을 제도나 통계가 아닌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로 전달하고 있다.
《서재 너머의 삶》은 개인이 간직해 온 기록을 사회의 공동 자산으로 전환하고, 미래 북한인권박물관이 수행할 수집·보존·연구·전시의 역할을 현재의 공간에서 먼저 보여주는 시도다. NKDB는 이번 기증품전을 시작으로 북한인권전시실 내 작은 기획 코너를 지속해서 운영할 예정이다.
이는 시민이 소장한 기록과 예술가 및 다양한 분야의 협력자들이 북한인권을 새롭게 해석한 콘텐츠를 주기적으로 선보임으로써,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북한인권 침해 현실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함이다.
NKDB는 “또한, 시민들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전하는 전달자로 참여하는 장을 만들어 감으로써 북한인권 상황이 개선되고 침해가 중단되는 그날까지 지속적인 관심과 연대를 이어가고자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