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역사성 부정하는 유신진화론, ‘구원론의 붕괴’로 이어져”

교회일반
인터뷰
노형구 기자
hgroh@cdaily.co.kr
[인터뷰] 김병훈 합동신대 석좌교수
김병훈 교수. ©노형구 기자

진화론과 기독교 신앙의 조화를 모색하는 ‘유신진화론’은 오늘날 과학 시대에 발맞춘 이론으로 교회 내부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지난 5월 제120차 총회에서 유신진화론을 이단으로 공식 규정하기도 했다. 유신진화론에 대해 김병훈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유신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창조와 진화의 조화는 왜 인간의 타락과 원죄 교리를 무너뜨리고 궁극적으로 구원론 전체의 붕괴로 이어지는가?

“유신진화론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적으로 한 개인으로서의 아담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 곧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역사적·생물학적 단일 기원론(Monogenism)을 전면 부정한다는 점에 있다. 성경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행 17:26)라고 선언하며, 첫 사람 아담을 하나님께서 직접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고 한 역사적 실체로 명시한다.

그러나 데니스 바벤(Denis Alexander)이나 프란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 같은 유신진화론 학자들이 주장하는 진화의 필연적인 발전 과정에 따르면, 오늘날의 현생 인류 이전에 반드시 선행 인류가 유전적 집단을 이루어 존재했어야만 한다. 따라서 유신진화론은 그 선행 인류 집단 중 어느 한 집단을 문학적·신화적으로 ‘아담’이라 칭했거나 상징적으로 불러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아담을 단지 ‘원형적 아담’이나 ‘상징적 대표’로 단순화함으로써, 창세기 2~3장의 초자연적 직접 창조와 타락의 역사성을 우화로 탈바꿈시키는 신학적 실수를 범하게 된다.

이처럼 다원 기원론(Polygenism)을 취하거나 아담을 상징적 존재로 보게 되면, 프란시스 튜레틴(François Turretin)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6장 2~3절)가 천명하는 인류의 혈통적·언약적 시조성이 무너지면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아담과 맺으신 행위언약의 대표성이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롬 5:17)이라는 말씀처럼 아담의 첫 범죄로 후손에게 타락한 본성과 죄가 전이된다는 원죄론의 토대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유신진화론은 인류가 등장하기 전부터 수억 년 동안 죽음과 멸종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죄가 있기 전부터 수억 년간 죽음이 존재했다는 유신진화론의 주장이 성경의 구속사적 가르침과 양립 가능한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롬 5:12)라고 명백히 밝힌다. 즉, 성경에서 죽음은 하나님의 본래적 창조 질서가 아니라, 아담의 범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공의로 내리신 사법적 형벌이자 저주이다.

유신진화론자들은 아담의 타락 이전 수억 년 동안 존재했던 죽음은 단순한 동물의 생물학적 죽음일 뿐 인간의 영적 죽음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가르치는 죽음의 범위를 심각하게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풀기 어려운 치명적인 모순에 봉착한다. 진화론의 메커니즘 자체가 수억 년 동안 끊임없는 생물학적 사멸과 적자생존의 도태 과정을 필수적인 전제로 삼기 때문에, 만약 아담의 타락 이전부터 이미 처참한 죽음과 멸종이 자연의 법칙으로 존재했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선한 창조 세계의 정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더욱이 아담의 타락 이전부터 이미 육체적 죽음이 자연스러운 질서로 존재했다고 인정하는 순간 기독교 구속사의 뼈대는 연쇄적으로 무너진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의미가 변질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죽음은 단순한 영적 형벌의 담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인 육체적 죽음과 저주를 우리 대신 온전히 담당하신 대속의 죽음이다. 만약 타락 전 육체의 죽음이 죄의 형벌이 아닌 본래부터 존재하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고통스럽고 비참한 죽음의 형벌을 당하실 신학적 필연성과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유신진화론의 주장대로 죄의 형벌이 영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대속 역시 영적으로만 이뤄지면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마지막 날 성도가 누리게 될 ‘육체의 부활’ 교리 역시 근본적인 기반을 잃게 된다. 유신진화론의 주장대로 육체의 죽음이 죄의 저주가 아니라 진화의 오랜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수반된 산물에 불과하다면, 구속받은 성도가 부활을 통해 다시 영원한 육체의 생명으로 회복되어야 할 논리적 당위성 역시 성립할 수 없다. 결국 죽음을 죄의 결과로 보지 않고 진화의 수단으로 수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육체적 대속과 부활이라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 진리를 지탱하는 구속사적 뼈대 전체를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첫 사람 아담(사망)’과 ‘마지막 아담(생명)’의 연합을 통해 구원의 논리를 세웠다. 유신진화론의 논리대로 첫 사람 아담을 진화 과정의 상징적 산물로 볼 때,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이 갖는 객관적 역사성은 어떻게 무너지게 되는가?

“구약의 족보와 누가복음 3장(23~38절)은 아담을 구속사의 실제 역사적 시조로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님 역시 창세기의 역사적 사실성을 직접 확증하셨다. 이를 바탕으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18~19절에서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사람 그리스도’를 엄밀하게 대조하며 구원의 논리를 전개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신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바울이 위 로마서 5장 18~19절에서 사용한 대표적인 헬라어 구문은 ‘호스페르(ὥσπερ, 마치 ~처럼)’와 ‘우토스(οὕτως, 이와 같이)’의 상관 구문인데, 이 ‘호스페르… 우토스’ 구조는 두 인물의 개별적·역사적 사실성이 정확하고 동일한 평형을 이룰 때에만 성립하는 정교한 사법적 논리구조이다.

따라서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육체적 죽음과 부활이 시공간 속에서 일어난 실제 사실이라면, 그와 병행 관계에 있는 첫 사람 아담 역시 반드시 역사적·실체적 인물이어야만 이 평행 구조와 구원론적 논리가 성립된다. 반대로 원인이 되는 첫 사람 아담을 단지 신화나 비유, 상징에 불과한 존재로 격하시킨다면, 그 원인에 대응하여 결론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건과 역사적 부활 역시 단지 하나의 신화나 상징적 이야기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유신진화론은 약육강식과 멸종을 하나님의 창조 도구로 본다. 수억 년간의 참혹한 죽음과 생존 경쟁을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라 주장할 때,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에는 어떤 치명적인 모순과 균열이 생기는가?

“유신진화론처럼 수억 년의 약육강식과 멸종을 하나님의 창조 방식으로 수용할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속성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성경이 증거하는 창조주는 만물을 지으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셨으며, 그 피조세계 안에는 본래 생명의 존중과 조화가 가득했다. 그러나 진화론의 메커니즘은 그 본질상 수많은 생물의 무자비한 도태와 적자생존, 그리고 참혹한 고통을 필수적인 전제로 삼는다. 약육강식과 생존 경쟁을 거쳐 인간에 이르게 되었다는 주장은 결국 피조세계에 가득한 악과 저주, 그리고 무의미한 고통의 원인조차 하나님께서 직접 기획하고 사용하신 창조의 도구로 돌리는 심각한 신론적 왜곡을 낳는다. 이는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 속에 악의 기원을 내포시키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둘째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지혜’의 속성에도 심각한 균열이 생긴다. 진화론의 핵심 과학적 기제는 목적지가 없는 ‘무작위적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라는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만약 유신진화론의 주장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이라는 최종 목적지를 염두에 두셨으면서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억 년 동안 무수한 실패와 돌연변이, 그리고 적응하지 못한 생물들의 절멸과 참혹한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방식을 택하셨다면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와 능력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특히 마이클 베히(Michael Behe) 등이 제기하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의 개념을 대입해 보면 이 모순은 더욱 극명해진다. 생명체의 세포 내 기관이나 면역 시스템처럼, 수많은 하위 요소가 동시에 완전한 형태로 갖춰지지 않으면 아예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고도의 복잡계가 존재한다. 진화론의 점진적 무작위 변이 방식대로라면, 이 중간 단계의 불완전한 구조들은 생존에 아무런 이점을 주지 못하거나 오히려 도태의 원인이 될 뿐이어서 기능적인 완성에 이를 수 없다.

이러한 복잡성을 지닌 생명체가 출현하기까지 수억 년의 세월이 흘렀다면, 그 과정에서 중간 단계의 생물들은 수많은 무익한 결함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잔인한 고통의 과정을 하나님이 창조의 수단으로 삼으셨다고 보는 것은 신학적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말씀 한마디로 단번에 완전하고 조화로운 만물을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비효율적이고 잔인한 자연 도태의 방식을 하나님의 창조 지혜로 미화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전능성과 주권적 지혜를 크게 훼손하는 치명적인 모순을 낳게 된다.”

-유신진화론의 논리대로 진화론의 ‘눈먼 우연’과 성경의 ‘목적 있는 설계’ 세계관을 조화시키려 할 때 발생하는 구체적인 신학적·논리적 충돌은 무엇인가?

“유신진화론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치명적인 논리적 속임수와 허구에 기초하고 있다. 진화론의 본질적 기제인 ‘무작위적 돌연변이(눈먼 우연)’는 철저하게 어떠한 목적성, 사전 계획, 그리고 완성된 설계 구조를 배제한 통계적·물리학적 확률 과정이다. 즉, 진화론의 전제에 따르면 돌연변이는 어떠한 의도나 방향성 없이 우연히 일어난다. 만약 유신진화론 주장대로 우연히 발생한 변이가 생명체로서 의미 있는 변화로 존속하고 다음 단계로 발전하려면, 이미 그 체계를 뒷받침하는 정교한 유전자 정보와 생명 통제 시스템이라는 ‘설계’가 전제돼야 한다. 따라서 우연과 설계는 출발점부터 그 전제가 서로 충돌하기에 조화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러나 유신진화론자들은 자신들의 진화적 세계관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의 섭리 개념을 교묘하게 끌어다 쓴다. 성경에서 제비뽑기(잠 16:33)나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른 것(룻 2:3)처럼 인간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 안에서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된다. 유신진화론은 바로 이 성경의 섭리 속 ‘우연’ 개념을 오용하여, 아무런 목적도 설계도 없는 무방향적 진화 과정에 억지로 적용하려 드는 것이다. 즉 ‘방향성 있는 우연’, ‘목적성 있는 우연’이라는 개념을 창출한다.

하지만 이는 성경적 섭리의 본질을 왜곡한 결과다. 진화론과 타협하기 위해 만들어낸 완벽한 형용모순이자 논리적 파탄이다. 왜냐하면 ‘우연’이란 본질적으로 목적이나 원인의 방향성이 결여된 상태를 가리키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연에 목적성을 부여하는 순간 이미 ‘우연’의 정의 자체는 완전히 깨지게 된다.

철저하게 무신론적 입장을 취하는 진화론자들조차 이 논리적 허점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이들은 유신진화론을 향해 ‘우연과 목적 있는 설계는 철학적으로 명백한 모순이다. 진화론은 무목적적 우연의 체계인데 왜 거기에 하나님과 설계를 덧붙여 하이브리드(혼종)로 만드느냐’고 날카롭게 조롱한다.

신학적으로 볼 때도 피조물들이 인식하는 ‘존재론적 우연’조차 하나님 편에서 그 모든 과정이 확실한 필연일 뿐이다. 따라서 무방향적 우연의 메커니즘과 하나님의 목적 있는 설계를 억지로 조화시키려는 유신진화론의 시도는 신앙과 과학 양쪽 모두에서 배척당하는 심각한 논리적 오류이자 범주 오류일 뿐이다.”

-진화론을 수용하지 않으면 ‘반지성적’이라는 세속의 비판이 있다. 성경의 무오성과 창조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고수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왜 참된 기독교 지성의 출발점이 되는지 설명해 달라.

“참된 기독교 지성이란 성경의 보편적인 독법과 성경 자체의 장르적 성격에 순종하는 데서 출발한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기록은 시(Poetry)나 비유가 아니다. 이는 명백한 역사적 서사(Narrative)이다. 예수님과 바울, 사도들 역시 창세기의 창조, 아담, 타락, 결혼 제도를 모두 객관적 역사 사실로 전제하고 인용하셨다. 만약 창세기의 역사 사실성을 버리고 이를 비유나 상징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하면,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는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특히 오늘날 세속 과학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세기 1~3장의 역사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오병이어의 기적, 홍해 사건, 나사로의 부활, 나아가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까지도 모두 부정해야 한다. 이 모든 기적적인 사건 역시 경험적 과학의 기준에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성경의 모든 기적을 단순한 ‘상징적 이야기’로 격하시키는 합리주의적 자유주의 비평학으로 빠지게 된다.

따라서 시대에 따라 변하는 잠정적인 가설에 맞추어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시 말씀을 굴절시키거나 타협하는 것은 결코 참된 지성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의 역사성과 무오성을 굳게 견지하면서, 진화론이 숨기고 있는 철학적 전제의 비합리성과 과학적 한계를 비판적으로 꿰뚫어 보는 것이야말로 참된 기독교 지성의 올바른 태도다.”

대표적인 진화론자 중 한 명인 리처드 도킨스.. ⓒFacebook/The Richard Dawkins Foundation for Reason and Science.

-반대로, 세속 과학이 객관적 사실처럼 주장하는 진화론이 확고한 정설이 될 수 없고 또 다른 ‘믿음의 영역’이자 가설에 불과한 이유는 무엇인가?

“진화론은 과학적 증거로 완벽히 입증된 절대적 정설이 결코 아니다. 겉으로는 철저히 객관적인 과학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논리 구조를 깊이 들여다보면 ‘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라는 증명 불가능한 철학적 전제가 뼈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리적 비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찰 과학(Observational Science)’과 ‘기원 과학(Origin Science)’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실험실에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반복해서 검증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제한적이다. 환경에 따라 생물의 형태가 조금 변하거나 세균이 항생제 내성을 갖는 현상 등이 그 예다. 하지만 이는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종(種) 안에서 유전자 정보가 재조합되거나 소실되며 일어나는 소규모의 적응, 즉 ‘미시진화’에 불과한 관찰 과학의 영역이다.

문제는 세속 과학이 관찰 가능한 이 작은 변화들을 근거로 엄청난 논리적 도약을 감행한다는 점이다. 수억 년 동안 무기물에서 단세포로, 그리고 단세포가 맹목적인 돌연변이를 거쳐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거대한 기원론인 ‘대진화’를 객관적 사실처럼 주장한다. 인류 이전에 생명이 어떻게 처음 출현하고 전혀 다른 종으로 나뉘었는지 시공간 속에서 직접 관찰하거나 실험실에서 재현해 낸 과학자는 아무도 없음에도 말이다. 즉, 대진화는 관찰 과학이 아니라 과거의 흔적을 추론하는 기원 과학의 영역이다.

이처럼 관찰 불가능한 과거의 기원을 설명할 때, 세속 과학은 자의적인 규칙 하나를 미리 세워둔다. 바로 ‘세상의 모든 기원과 현상은 오직 자연 내부의 물질적 원인과 우연으로만 설명해야 한다’는 규칙이다. 이는 진리 탐구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하나님의 초자연적 창조나 개입’이라는 정답의 가능성을 아예 제거해 버리는 작업이다. 초자연성을 완전히 배제한 채 남은 물질적 원인들로만 억지로 퍼즐을 맞추려다 보니, 결국 ‘눈먼 우연에 의한 진화’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세속 과학이 주장하는 대진화는 순수한 객관적 데이터의 산물이 아니다. ‘초자연적인 것은 없다’는 무신론적·철학적 신념의 안경을 낀 채, 제한된 데이터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낸 거대한 학문적 ‘가설’일 뿐이다. 진화론 역시 창조론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세계관적 전제를 믿고 받아들여야만 성립하는 또 하나의 신념 체계이자 믿음의 영역이다.”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성경)보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가변적인 현대 과학적 가설을 더 상위의 권위로 두는 태도가, 결국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어떻게 무력화하는지 지적해 달라.

“유신진화론 진영은 과학과 신앙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보완한다는 이른바 ‘상보설’을 내세운다. 즉, 과학은 창조의 ‘방법(How)’을 설명하고 성경은 창조의 ‘목적과 의미(Why)’만을 다루므로 양자가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만 평화로울 뿐, 실제로는 현대 과학의 자연주의적 가설을 성경적 계시 위에 군림하게 만드는 교묘한 프레임이다.

성경은 결코 추상적인 도덕이나 관념적인 ‘이유(Why)’만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말씀으로)’, ‘무엇을’, ‘누구를 통해’ 세상을 지으셨는지 그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역사적 사실(How)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자연주의에 바탕을 둔 진화론적 가설을 지식의 최고 권위로 수용하는 순간, 치명적인 주객전도가 일어난다. 성경이 증언하는 객관적 역사의 기록들은 과학의 잣대에 밀려 단지 고대 근동의 신화나 상징적 비유로 격하되어 버린다. 결국 과학이 허용하고 인정하는 테두리 안에서만 성경 구절을 취사선택하게 되며, 이는 곧 가변적인 세속 학문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최종 해석자(Final Interpreter)’의 자리를 찬탈하는 결과를 낳는다.

가장 심각한 비극은 성경적 창조의 역사성을 세속 과학에 내어줄 때, 기독교 윤리를 지탱하는 절대적 기준도 연쇄적으로 붕괴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기원을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목적 있는 창조가 아니라 무작위적 돌연변이와 진화의 우연한 산물로 규정하게 되면, 인류의 존재 목적은 사라지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도덕적 상대주의만 남게 된다.

특히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남녀의 창조와 결혼 제도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진화 과정의 산물이나 신화로 부정되기 때문에, 근본적인 '창조 질서'가 해체된다. 그 결과 동성애나 젠더 이슈, 성 윤리 문제 등 세속화의 거센 파도 앞에서도 성경의 권위로 단호한 윤리적 경계를 세울 수 있는 객관적 근거와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유신진화론이 청년 신학도들과 다음 세대의 영적 상태에 미치는 치명적인 해악은 무엇이며, 이에 대해 어떤 신학적·목회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가?

“유신진화론의 수용은 기독교 신앙의 뼈대를 이루는 계시의 유기적 통일성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첫째, ‘창조-타락-구속-하나님 나라’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상실과 구원론의 붕괴다. 유신진화론자들은 창조와 타락의 역사성(팩트)을 배제한 채 구원론(의미)만 따로 떼어 유지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타락-구속-하나님 나라(새 창조)’라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이고 거대한 구속사적 서사를 뼈대로 삼는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완전한 창조 세계가 아담이라는 역사적 시조의 타락으로 인해 저주 아래 빠졌기에 요청되는 회복의 은혜다. 창세기 1~3장의 역사성을 신화로 파편화하면 타락의 실제적 인과관계와 심판의 절대적 기준(율법)이 사라진다. ‘첫 사람 아담’의 역사적 타락(병의 원인)이 허구라면, ‘둘째 아담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치료)은 물론이거니와 마침내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향한 영광스러운 구속사적 소망 역시 실체 없는 관념적 고백으로 전락하고 만다.

둘째, 종말론적 소망의 상실이다. 유신진화론은 인간의 영혼과 정신마저 왜곡한다. 진화론적 사고를 끝까지 밀고 가면, 인간의 도덕과 정신은 집단 생존을 위한 뇌 생리학적 진화의 산물로 환원된다. 육체는 진화했고 영혼만 하나님이 불어넣으셨다는 어설픈 타협론은, 결국 죽음 이후 육체와 함께 영혼도 소멸한다는 ‘사후 영혼 존재 부정론’으로 기울기 쉽다. 더 나아가, 이는 성도가 대망하는 ‘종말론적 소망’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뿌리째 흔든다. 만약 이 땅의 첫 창조가 138억 년간의 무수한 멸종과 참혹한 약육강식이라는 시행착오적 진화의 결과라면, 역사 속에서 죄와 사망을 끝장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순식간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하나님 나라)’의 초자연적 완성은 하나님의 창조 방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첫 창조의 역사성과 초자연적 능력을 부인하는 태도는, 결국 마지막 날에 단번에 이뤄질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성도의 육체적 부활 소망마저 송두리째 앗아간다.

셋째, 공적 신앙고백의 해체와 신앙의 이원화다. 보편 교회가 사도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등을 통해 고백해 온 ‘공적 신학(Public Theology)’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적 창조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유신진화론은 검증되지 않은 자연주의적 가설에 성경 계시를 종속시킴으로써, 교회가 피 흘려 지켜온 객관적 진리 체계를 세속 이성 앞에 무릎 꿇게 만든다. 그 결과 다음 세대 청년들과 신학도들의 내면에는 치명적인 ‘신앙의 이원화’가 자리 잡는다. 과학은 ‘객관적 사실’로, 성경은 ‘주관적 비유나 허구’로 규정하는 순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기적, 육체적 부활 같은 성경의 핵심 진리들도 역사적 사실로 믿지 못하게 되며, 성경을 단순한 도덕 교과서로 치부하는 영적 무기력증에 빠지게 된다.

넷째, 유신진화론의 필연적 종착지는 불가지론이다. 우리는 유신진화론을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도달하는 필연적 귀결을 직시해야 한다. 칼빈대학교의 저명한 유신진화론자였던 하워드 반 틸(Howard J. Van Till) 교수는, 만물이 스스로 조직하도록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이신론적 발상에 철저해지다 결국 칼빈주의와 초자연적 신관을 모두 버리고 불가지론(Agnosticism)과 신앙 이탈을 선언했다. 이것이 타협의 궁극적 종착지다.

그러므로 ‘훌륭한 기독 지성인이 되려면 유신진화론을 수용해야 한다’는 세속의 오만한 프레임에 속아서는 안 된다. 참된 기독교 지성은 세속 과학의 패러다임에 성경을 뜯어맞추는 자들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 위에서 자연주의 가설이 가진 과학철학적 한계와 비합리성을 날카롭게 짚어내고, 피조세계에 담긴 정교한 설계와 하나님의 권능을 정직한 학문적 데이터로 입증해 내는 자들이다. 학문적 세련됨이라는 포장지에 미혹되지 말고,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계관의 최고 권위로 삼아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거룩한 학도들이 되기를 간곡히 당부한다.”

#김병훈 #유신진화론비판